6) 가시 돋힌 용서는 용서가 아니다.

가시 돋힌 용서란 무엇인가? 예를 들면 “000씨가 권하니까 일단 용서는 하지만 당신이 나에게 준 상처는 결코 잊지 못할 거야”라는 식의 용서이다. 이것은 용서가 될 수 없다. 무디 선생(D. L Moody)은 이것을 “고슴도치 용서”라고 했다. 메튜 핸리(Matthew Henry)는 “겉으로는 평화스럽고 화해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은데, 용서할 때에는 적의를 품어서도 안 되며 누구에게 악한 감정을 가져서도 안 된다. 어떤 형식으로든지 복수하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피해를 입히고 화나게 한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원하며 추구하는 마음의 자세가 아니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한 것처럼 보이고, 또 화평한 것같이 보여도 중심에는 악한 감정이나 불만이 있거나 시기 질투에 의하여 상대를 나의 중심에서 경계하는 것이 있으면, 가시 돋힌 고슴도치 용서인 것이다.

7) 상대방을 진심으로「이해」해 주려는 태도를 통하여 용서의 문을 열어야 한다.

「이해」라는 용어는 영어로 "Understand"라고 한다. 이 단어는 '아래에 선다'라는 말이다. 겸허하고 겸손한 태도로 상대방을 대하는 자세이고, 상대방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상대방이 어려울 때, 곤경에 처할 때 그런 입장이나 경험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남의 사정을 모르고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8) 용서한 후에는 용서 할 수 없었던 모든 사실을 잊어 버려야 한다.

스펄전 목사는 '용서'에 대하여 아주 유머러스하고도 의미심장한 표현을 하였다. “용서하고 잊어버리십시오, 당신이 미친개를 땅에 묻을 때 꼬리만 땅 위로 기념탑처럼 남겨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라고 한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옛날에는 미친개를 끌어다가 산채로 땅에 묻었던 것으로 본다. 버림 받고,제 구실도 못하고, 위험하기까지한 개를 묻을 바에는 완전히 묻어 버려야지 땅 위에 꼬리만 남겨 둘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타인의 죄를 용서한 후 완전히 잊어 버려야지 일부분을 다시 기억하고 남겨 놓아서는 안 된다. 잊어버리지 않는 용서의 꼬리들이 이곳저곳에서 흉한 모습을 드러내는 현장들이 사라져야 한다.

9) 용서는 믿음으로 사랑을 시작할 때부터 가능해진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사랑하는 훈련을 통해서 용서가 실천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 신앙이 성숙하는 것은 각자의 믿음의 분량과 비례한다.

믿음의 대헌장을 기록한 로마서 1:17은 모든 사람이「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비결은「오직 믿음」으로 가능케 됨을 언급했다.「용서」가 점점 사라지는 탁한 세상에서「믿음으로 사랑」하여 용서할 수 있는 진실하고 용기 있는 용서가 필요하다.

10) 용서를 베푸는 삶을 생활화(습관화)해야 한다.

(1)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건강한 정서 생활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2)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복음 전도 사역을 더욱 효과적으로 감당하게 할 수 있는 요소이다.
(3)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교회 생활에서 성도간의 교제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4)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성공적인 결혼 생활과 건전한 가정 생활에 꼭 필요한 요소이다.
(5)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능력 있는 기도 생활에 꼭 필요한 요소이다.
(6)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성령 충만한 삶에 꼭 필요한 요소이다.
(7)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믿음의 담력을 갖게 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8)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용서의 삶을 훈련시키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9)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영혼의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10)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겸손하고 온유한 인격으로 성장시키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11)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가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12)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사단 마귀의 영역을 좁히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결 론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실현된 용서의 복음이다.

인간을 위한 두 번째 청원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청원이 차지하는 문맥의 위치(Where)와,죄는 무엇이며(What),죄를 용서해야 할 이유(Why), 또한 용서를 구하는 삶은 어떻게(How) 하느냐에 대해서 질문의 형태로 살펴 보았다. 죄인을 위한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삶의 전부를 준 것이었고 그 용서를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마태복음 6:14에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정신과 생활화가 신자들의 의식구조 속에서 어떻게 접목되고 있는가 하는 필자의 연구 논문의 사례에서 67.2%가 긍정적인 응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10명 중에 3-4명은 용서의 하나님과 사는 삶과는 거리가 먼 증오하는 마귀와 같이 살아가고 있다. 증오의 마귀는 우리의 육체와 정신의 건강과 영적인 건강을 해치며 성도의 가정과 그 모든 것을 파괴시키며, 믿음과 성령 충만한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간다.

그런 영혼은 불안과 슬픔이 가득하고, 교만과 오만으로 인해 사단이 춤을 추는 무대장으로 전락되고 만다.

그러나 용서할 때 마귀는 한 길로 왔다 열 길로 도망갈 것이고, 용서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된다. 날마다 양식(DAILY BREAD)을 구하는 것처럼, 날마다 용서(DAILY FORGIVENESS)를 생활화하여 우리가 “오늘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주기도문을 드리기가 몹시 괴롭고, 마음이 편안치 않다.”라고 고백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맑고 솔직하고 진실한 양심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양심의 가책 없이 이 청원을 드릴 수 있는 삶이 되기를 기대한다. 정직한 신앙의 척도는 용서의 삶을 삶의 현장에 옮겨 그곳에서 생활화 하고 실천하는 현재와 미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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