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소리 (4)

셔우드는 그의 조급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솔직히 말해 이 질병은 나로서도 처음 보는 병이다. 그러나 모든 증세를 종합해 볼 때, 런던의 열대병 학교에서 공부한 페스트(Pasteurella pestis)로 인한 희귀한 병인 것 같다”고 말하고는 잠시 그가 생각할 틈을 주었다. 그는 ‘Pasteurella pestis’란 병명을 처음 들어보는 모양이었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셔우드는 곧이어 “지금 말한 것은 임시 진단에 지나지 않지만, 환자의 타액 샘플을 병리 실험실에서 현미경으로 관찰해 전형적인 음성 바찔루스 균이 하나씩 또는 쌍으로 나타나면 진단을 확실하게 내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셔우드가 감정을 상하지 않게 이야기하자 그는 체면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렇다면 이 전염병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이제 셔우드는 이 죽음의 병동에서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만이 앞섰다. 코와 입을 막고 있는 얇은 거즈 마스크는 병균으로 오염된 이 방의 공기에서 그들을 더 이상 보호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마스크 자체가 얼마나 빨리 병균에 오염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항상 전염의 위험성이 있는 결핵 환자들을 치료해왔고 또 전염병에 대해 무지한 환자가 내 얼굴에 대고 기침을 할 때도 숨을 쉬지 않고 참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이번 경우는 결핵보다 더 위험했다. 처음으로 간호사들의 공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이란 뭐든지 자기가 경험해 봐야만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모양이라고 셔우드는 생각했다.

셔우드는 되도록 냉정하려고 노력했으나 그 군의관은 셔우드의 목소리에서 긴급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들은 재빨리 그 방을 나와서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그의 넓은 사무실로 가서 녹차를 마시며 비로소 편안한 분위기에서 셔우드의 진단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했다.

최근 서울에서 열렸던 의학 회의에 대해 그에게 들려 주었다. 그날 회의에는 목단의 의료선교센터에 있는 의사 한 분이 연사로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북만주 지방에 무서운 전염병이 휩쓰는 바람에 오지 못했다. 불행하게도 그 의사 자신도 전염병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그 병에 걸리고 말았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역병은 옛날부터 있었던 재앙입니다.”

셔우드는 군의관에게 역병의 재앙을 상기시키며 말했다.

“성경에도 역병에 대한 기록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무엘상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전쟁한 후 3만 명이나 죽은 전투지에서 역병이 일어났는데 팔레스타인 족들은 그들의 승려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커다란 쥐의 상을 금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공손하게 내 말을 경청하고 있던 군의관은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는지 한 마디 내뱉었다.

“선생, 그렇지만 이번 역병에는 항상 진단되는 임파선의 팽창부가 없다고 하지 않았소.”

그는 매우 호전적인 태도였다. 우선 그의 노기를 가라앉혀야겠기에 셔우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나도 그런 팽창부를 찾지 못했어요. 그러나 그 역병에는 한 가지 종류만 있는 게 아니고 두 가지가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흔한 것은 기후가 따뜻한 지방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추운 지방에서 생기는 것도 있습니다. 후자가 훨씬 더 무섭습니다. 이 종류는 아마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무서운 역병일 겁니다. 옛날 사람들은 그것을 흑사병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당신이 당면하고 있는 역병은 흑사병임이 틀림없습니다. 이곳의 환자들은 추운 지방에 최근까지 있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역병은 모든 쥐들에 의해 전염됩니다. 쥐벼룩이 사람을 물 때 병균이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기를 통해 옮기는 것이 훨씬 더 무섭죠. 그건 사람에서 사람으로 직접 전염되기 때문이지요. 이곳의 환자의 경우가 그런 것입니다.

셔우드는 군의관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연달아 깊이 숨을 쉬었다.

“그렇습니까?”

그는 거의 사죄하는 듯한 어조로 간청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이 이미 조치한 것은 모두 잘한 겁니다. 그러나 당신과 직원들의 안전을 위해 당장 마스크의 두께를 최소 8배로 늘리고, 그 위에 디플렉션 마스크(deflection mask)를 써야 합니다. 전염도가 매우 높으니 보안경을 쓰는 게 좋겠습니다.”

군의관은 두려움을 감추느라 미소를 지으려 했으나 공포로 인해 돌같이 굳어지는 모습이 역력했다. 셔우드는 재빨리 화제를 환자들의 보호에 대한 문제로 돌렸다. 아직 감염되지 않은, 부상 당한 환자들을 위해 고양이를 두면 쥐들이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고 제의했다. 그는 아직 공포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점점 안정감을 되찾아 기분이 밝아졌다.

“대국적인 면으로 생각하면 시의 위생국에서도 전면적인 쥐 소탕전을 벌여야 합니다. 쥐꼬리를 가져오는 사람들에게 상금을 주도록 공고하고 각 지역에서 고양이를 기르게 해야 합니다.”

군의관은 셔우드의 진단과 병동 직원들의 안전을 위한 제안, 그리고 전반적인 의견에 대해 매우 감사하는 것 같았다. 셔우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그 군의관은 이 무서운 전염병과 신체가 절단된 군인들에 대한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재삼 주의를 주었다.

흑사병균의 발효 기간은 약 7일이다. 그 얇은 거즈 마스크를 통해 셔우드에게 균이 감염되지나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기간 동안 가족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기로 서둘러 결정했다. 셔우드는 평양의 연합기독병원에 가서 건강 진단을 받기로 했다. 선교사들은 매년 건강 진단을 받는 게 관례로 되어 있어 셔우드가 갑자기 평양 병원으로 떠난다고 해서 의심할 사람은 없었다. 혹시 병에 감염되었을 경우 평양 병원은 시설이 잘 되어 있는 격리 병동이 있으므로 셔우드는 가족과 격리되어 안심하고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다행히 셔우드는 감염되지 않았다. 쥐들을 섬멸하여 득의양양한 일본군과 쥐가 없어져서 희색이 만면한 쌀장수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 기대하면서 해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셔우드의 기대는 상상에 불과했다. 셔우드가 나중에 비밀리에 들은 이야기로는 새 환자가 더 늘어나지 않자 수석 군의관은 공중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쥐들은 선전 포고를 당하기 직전에 대살육전을 모면한 셈이다.

해주는 중요한 항구로 변하고 있었다. 셔우드 가족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단선의 기차 철도조차 없었는데 두 지선의 철로가 만나는 역이 세워졌다. 두 기독교파의 선교 기지도 해주에 자리 잡기로 결정되었다. 하나는 구세군으로 안트(G. S. Arndt) 소령 부부였고, 다른 하나는 영국 성공회로 평양에 있던 캐럴(E. I. Carroll) 신부가 전임을 왔다. 그는 안식년 휴가로 영국에 갔다가 해주에 부임했다.

새 선교사들은 모두의 환영을 받았다. 유독 일본 육군만이 의심의 눈초리로 이들을 지켜 보았다. 일본 군부는 전쟁에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상황에 있는 영국이 어떻게 징병 연령에 해당하는 젊은이를 외국으로 보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구나 군대식 복장과 계급을 단 구세군에 대해 일본군 고위층은 매우 못마땅해 했다. 안트 부부는 곧 어디론가 전임이 되었다.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본 군부의 작용인 것 같았다. 캐럴 신부는 그대로 남았으나 농부로 변장한 수상한 사람들이 그의 집 주위에서 일하는 척하면서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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