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의 그림자

2014년 4월 16일 아침, 전라남도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세월호 침몰 사건은 304명의 희생자를 남겼을 뿐 아니라 아직도 한국사회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1년이 지났건만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위한 세월호 특별법을 둘러싼 정치권의 줄다리기는 계속되고 있고,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근본적인 대책은 요원해 보인다.

한국교회도 세월호 참사의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병증은 심각해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한국교회의 대처를 살펴보면, 더욱 한심해 보인다. 한국사회는 구원파에 대한 사법적 처리와 유족에 대한 피해 보상, 특별법 시행령 제정 등 최소한(?)의 조치를 취했지만, 세월호 참사와 구원파에 대한 한국교회의 의미있는 대처는 찾아보기 힘들다. 세월호 참사 유족 중 76명이 기독교인이며, 이들 중 약 80%가 참사 후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는 통계는 세월호 참사가 구원파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교회 전체와 연관됨을 드러내는 방증이다. 한국교회는 가족을 잃고 슬픔에 잠긴 세월호 유족들을 위로하고 품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다수 유족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고 있다. 가난한 자, 슬픈 자, 고난 당한 자, 병든 자, 장애를 가진 자, 낮고 비천한 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고, 심지어 이들을 교회밖으로 몰아내기까지 하는 한국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참 교회상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세월호와 미주한인교회는 무관한 것 같지만, 한국교회의 병증과 미주한인교회의 병증을 비교해 보면, 오히려 미주한인교회의 현실이 더욱 심각함을 알 수 있다. 이민사회의 고단함 때문에 대다수의 한인들이 개신교 신앙을 소유하고 있지만, 정작 이들 중 교회를 안 나가거나 못 나가는 사람들이 교회 출석 성도들보다 훨씬 많다. 멀쩡하게 교회를 잘 다니다가 세월호 참사를 당하고 난 후 더이상 교회에 출석하지 않거나 못하는 유족들처럼, 이런저런 어려움과 슬픔을 당하고 난 후 더 이상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미주한인사회에 넘쳐난다. 하나님의 사랑과 성도의 위로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 정작 교회에 발 붙이지 못한다면, 그런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 강도 당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몰아내는 교회를 참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

본질의 외면

세월호 참사라는 프리즘으로 한국사회와 한국교회, 그리고 미주한인사회와 한인교회를 조망해 보면, 묘한 동질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을 관통하는 동질성은 바로 ‘본질의 외면’이다. 유족들은 진상 규명을 부르짖지만, 기득권층들은 결사적으로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막는다. 한국교회가 병들었다고 안팎에서 부르짖지만, 그 실체를 드러내고 치유하려는 움직임은 늘 핍박의 대상이 된다. 한인사회와 한인교회의 개혁을 외치는 목소리는 넘쳐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성역(聖域)을 고수한다.

본질과 진실을 외면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근거한다. 부패와 타락,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하는 것은 정도의 차이를 떠나 모든 사회가 겪고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문제는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사회보다 더 둔감하고 더 어둡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빛의 자녀들’의 모임이며, 진리와 진실 앞에 정직하고 솔직해야 한다. 연약함과 부족함, 그리고 실수와 죄악을 정직하게 인정하며 회개하고 개혁하는 것은 교회와 성도의 본질적인 책무이자 그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본질과 진실을 외면하는 교회는 참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한 교회, 더 이상 교회로 불리기를 포기한 교회이다.

구원파의 본질: 삶과 윤리의 실종

한국교회와 미주한인교회가 회피하고 있는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월호 참사의 중심에 위치한 구원파의 본질과 동일하다. 한국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된 구원파는 사실상 한국교회의 구원론을 급진적 형태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의 아바타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사영리’ 수준의 구원론에 대한 지적 확신(혹은 믿음)으로 구원, 영생, 천국이 보장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지적 확신과 믿음은 강조되지만, 정작 믿음의 열매이자 증거인 회개와 거룩한 삶의 추구는 약화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구원을 얻는다)’만 강조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는 가르침은 외면한다. 그 결과 신앙은 강조하지만, 신앙에 합당한 삶과 윤리는 빈약하다. 한국교회는 거룩한 삶과 복음에 합당한 제자의 삶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약화시키고, 세상의 성공과 번영과 방종을 추구하기 위해 다소 복잡하고 교묘한 메시지를 에둘러 가르친다.

반면, 구원파는 구원에 대한 한국교회의 가르침을 급진적으로 단순화하고, 구원에 대한 특정한 지식과 깨달음을 절대화한다. 그들은 구원에 대한 이 지식과 깨달음을 소유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으며, 이것은 삶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강조한다. 현재, 과거, 미래의 어떤 죄에 대한 죄책감 혹은 회개도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오히려 죄에 대해 무감각하고 뻔뻔한 것이 구원받은 증거로 간주되고, 타락하고 방종한 삶이 장려되고 정당화된다. 정통기독교가 십자가의 도를 부인하기 위해 다소 복잡하고 정교하고 간접적인 메시지를 선포한다면, 구원파는 이를 보다 단순하고 명확하며 직접적인 메시지로 전환해서 가르친다. 양자의 이런 차이점은 부차적인 것이며,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목적을 가진 동질의 메시지이다. 양자의 목적은 거룩한 삶, 복음에 합당한 삶,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 세상의 모든 죄와 타락과 방종에 대한 면죄부를 획득하는 것이다. 이들은 십자가의 도와 거룩한 삶에 대한 강조를 ‘행위 구원’으로 매도한다. 거룩한 삶의 열매가 없는 자들을 지속적으로 권징하고 출교시켰던 종교개혁자 칼빈이 현대 한국교회 혹은 미주한인교회에서 목회를 한다면 당장에 ‘행위구원론자’로 매장당할 것이다.

참 기독교의 회복

오늘날 정통기독교는 종교개혁의 정신과 가르침에서 지나치게 멀어졌다. 종교개혁이 성공하고 확산될 수 있었던 가장 실제적인 이유는 그 가르침을 통해 실제적인 변화, 즉 거룩한 삶의 실현을 통한 개인과 교회와 사회의 명백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즉, 종교개혁자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삶의 변화를 통해 입증해낸 것이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 2:18). 야고보의 이 도전은 비기독교 사회가 현대 기독교에 던지는 핵심 질문이다. 이들은 ‘삶과 행위로 너희 신앙이 참됨을 증명하라!’고 외친다. 지난 한 세대 동안 이들이 던진 질문에 대해 한국교회는 침묵과 외면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 개독교라는 이름을 얻었고, 상대할 가치가 없는 광신적 집단으로 낙인찍혔다. 세월호의 침몰은 한국교회의 침몰을 상징한다. 이것은 미주한인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교훈이다.

이 수치와 절망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참 복음이 말하는 기독교의 정신과 실체를 회복하는 것밖에 없다. 참 복음을 선포하고, 참 교회, 참 기독교를 구현하는 것밖에 없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삶, 낮고 천한 자들을 품고 섬기는 삶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는 길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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