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라는 단어가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지도자의 공감 능력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도 있고, ‘sympathy’ 라는 단어와 ‘empathy’ 라는 단어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둘 다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긍휼히 여기는 감정을 포함합니다.

사람들은 공감을 인간관계의 기초요 행복한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라 합니다. 이 공감 능력은 이타심(Altruism)과도 연결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이타심이 더 많을까요? 모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보았습니다. 2011년 미국 공공과학 도서관 학술지 플로스 원에 보고된 자료라고 합니다. 생후 15개월 되는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준 뒤 좋아하는 것을 고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연구진은 아이들에게 그들이 고른 장난감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 중 1/3은 아무 것도 주지 않았고 1/3은 자기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뺀 나머지 장난감 중에서 하나를 주었답니다. 그런데 1/3은 자기가 좋아한다고 고른 그 장난감을 주었다고 하는군요. 이 실험은 이타심에 관한 것이라 합니다. 인간의 본능이라고 알고 있는 이기심과 반대되는 행동을 어린 아이가 했다니 놀랍습니다.

이타심을 개발하고 끌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도 있었습니다. 2015년 스탠포드 대학 연구팀에 의해 이루어진 실험은 이렇습니다. 생후 1-2살 된 아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 후, 한 팀에는 공 하나를 주고 연구진이 함께 놀아 주었고, 다른 팀은 각자에게 공을 주고 연구진은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놀던 중에 다른 사람의 물건이 떨어졌을 때 보이는 반응을 살펴보았다고 합니다. 떨어진 물건을 주워 주는 행동을 한 횟수가 두 번째 팀보다 첫 번째 팀이 세 배나 높았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의 사회적 유대감이 이타심을 끌어내는 데 필요하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대감은 나눔에 대한 필요와 같은 경험을 통해 강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엘리사 선지자가 활약하던 구약 시대의 일입니다. 아람 군대의 포위로 인해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성이 고립되었습니다. 그 기간이 길어지고 식량이 떨어지자 자녀까지 잡아먹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졌습니다. 그때 북 이스라엘에 네 명의 나병환자들이 있었습니다. 일반인들도 먹고 살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그들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나병환자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으로 아람 군대 진영으로 나아갑니다. 혹시나 거기엔 먹을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아람 진영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고 병사들이 놓고 간 식량과 무기들만 여기저기 널려 있었습니다. 뜻밖의 상황에 놀란 그들은 우선 먹을 것을 찾아 허기를 채웁니다. 그리고 아람 군사들이 버리고 간 귀중품들을 자기 주머니에 채웁니다. 얼마나 신나고 좋은 기회였겠습니까?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무래도 잘못하고 있다"(왕하 7:9).

무엇을 잘못하고 있다는 말일까요? 그들은 그곳 상황을 자신들만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고립되어 굶어 죽어가고 있는 사마리아 성의 자기 민족에게 빨리 알리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족의 아픔에 대한 공감과 그들을 위한 이타심이 작동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마리아 성에 소식을 알립니다.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들이 나병환자들이었다는 데 주목합니다. 그들은 불행한 질병 때문에 버림받고 공동체에서 거절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가족도 이웃도 없습니다. 같은 질병을 앓는 그들만이 서로의 가족이고 친구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살았고 생존을 위해 협력해왔습니다. 그런 결핍과 생존을 위한 고생의 경험은 오히려 타인의 존재와 아픔에 대한 공감 능력과 이타심을 발달시켰습니다.

개인주의와 풍요가 결합하면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이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복음도 전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도, 예수님의 삶의 모습도 아닙니다. 그분은 공감하고, 긍휼히 여기고, 자기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셨던 분입니다. 인간의 외로움을 공감하셨기에 하나님은 돕는 배필을 짓는 수고를 하셨고 공동체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혼자 살 수는 없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공감과 이타적인 마음을 갖지 않고는 행복한 사회는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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