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선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펴냄

 
책장을 덮었다. 다른 일본 소설을 읽었을 때와 유사하게 담백한 수채화 한 폭을 오래 들여다 본 느낌이다. 쓸쓸하고, 코끝이 시큰할 정도로만 슬프다. 마지막에 이르면 얽히고설킨 인물들의 이야기는 흐릿해지고 소설의 제목, 유럽에 있다는 ‘숲의 묘지’의 십자가만 남는다. 작중화자인 '나'가 고유한 이름이나 관계상 호칭을 마다하고 ‘그 사람’이라 부른 ‘그 사람이 언덕을 걷는다. 눈길을 피하지 않고 하얀 십자가를 향해 똑바로 걷는다... 십자가는 언덕 위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그 사람은 말없이 걷는다.’

‘그 사람’은 왕따에 시달리다 마당의 감나무 가지에 목을 매달아 자살한 중2 남학생 후지슌의 아버지다. 시신을 가장 먼저 발견해 거둔 장본인이기도 하다. 후지슌은 유서 한 장을 남겼다. 작중화자인 ‘나’에게는 절친이라며 고맙다 했고, 짝사랑한 여학생에겐 선물을 보내고 제대로 축하하지 못해 미안하다 했고, 왕따의 가해자 남학생 둘을 거명하며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이 소설은 자살한 후지슌의 가족과 중학교 동창 등 그의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이들의 20년 삶을 그리고 있다. 작중화자는 자신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후지슌의 죽음에 반응하는 모습이 변화해 가는 것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시간과 체험과 사유의 깊이에 비례해 그 농도가 짙어지는 슬픔, 사랑, 속죄, 용서를 추적하는 영적인 성장 소설로도 읽힌다. 작중화자인 나는 왜 후지슌의 아버지를 ‘그 사람’이라 불렀을까?

쉬쉬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학교, 책임의 무게를 덜려고만 하는 가해자들과 달리, 하루아침에 왕따 피해자의 고마운 절친이 되어 버린 나와 미안해라는 말을 듣게 된 후지슌의 짝사랑 사유리는 방관, 침묵, 무관심도 간접살인이라는 세간의 비난이며 자신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불편한 소리를 스스로 짊어지고 힘겹게 한 걸음씩 내디딘다.

어느 기자가 ‘나’에게 말한다. “사람을 비난하는 말에 두 가지가 있다. 나이프의 말과 십자가의 말이다. 나이프의 말은 가슴에 박힌다. 굉장히 아프고 쉽게 일어나지 못하거나 그대로 치명상이 되는 일도 있다. 나이프의 말에서 가장 아플 때는 찔린 순간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말은 다르다. 평생 등에 져야 하는 말이다. 그 말을 등에 진 채 계속 걸어가야 한다. 아무리 무거워도 내려놓을 수 없고 발길을 멈출 수도 없다. 살아 있는 한 계속 그 말을 등에 지고 있어야 한다.”

자식, 혹은 형제의 죽음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가족이 아픔을 품고 괴로워하는 삶을 선택했다면, ‘나’와 사유리는 아픈 기억을 망각의 강에 흘려보내지 않고 묵묵히 그 무게를 감내해 나간다. 20년째 되던 날에 사유리가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다. ‘우리는 모두 무거운 짐을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가 되어 걷고 있다. 그래서 내려놓을 수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등을 단단하게 만들고 다리와 허리를 튼튼하게 만드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은 죄악이다. 용기를 가져라. 친구를 죽게 만들지 마라.’ 작중화자의 말이다. 날마다 우리는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방관하거나, 못 본 척하거나 주머니에 손을 찌른 구경꾼이 되곤 한다. 그러한 문화에 푹 젖어 있다. 두렵고 그 무게를 감당키 어려워 고개를 돌리기도 한다.

작가는 ‘그 사람’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과 용서와 속죄의 짐을 지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야 한다고 모든 어른들에게 말하고 싶었던가보다.

(본문 중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날마다 추억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걱정하는 건 부모의 일이야. 자식을 믿는 것도 부모의 일이지.’

‘사람의 기억은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사건이나 한 사람에 얽힌 추억이 강물에 떠내려가듯 조금씩 멀어지고 잊힌다면 이야기는 간단하다. 하지만 실제로 추억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간다. 충분히 멀어졌다고 여겼던 추억이 갑자기 등골이 오싹할 만큼 생생하게 다가오고, 손에 들고 있던 것이 파도에 씻기듯 한꺼번에 먼 곳으로 떠나기도 한다. 바다는 잔잔할 때도 있고 거칠어질 때도 있다. 밀물일 때도 있고 썰물일 때도 있다. 그것을 반복하면서 추억은 조금씩 바다로 떠내려가서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그때 우리는 겨우 하나의 추억을 잊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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