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모세의 부모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나일 강에 던져져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에게는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을 것입니다. 부모의 짐이 되자고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필요하기에 부모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생명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죽어야 할 슬픔의 아이가 아니라, 아름답고 의미 있는 하나님의 아이로 보였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가장 어둡고, 슬픈 때에, 믿음의 눈으로 그의 아들을 보았습니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모든 것은 끝장입니다. 모세의 부모뿐만 아니라 그 민족 전체가 큰 화를 면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런데도 애굽의 통치자였던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은 용기! 이 용기를 단순히 부성애나 모성애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물론 그런 요인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용기의 출처가 부모의 믿음 때문이라고 역설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극복하게 만듭니다.

바로의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이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모세의 부모에게 이 용기를 가져다 준 것입니다. 모세가 살아서 하나님의 섭리로 인도를 받는 보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믿음으로 모세를 기른 그의 부모를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 모세의 부모는 아기를 더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기를 담아 나일 강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그 다음 모세의 부모의 행동은 ‘여기서 그냥 아기를 강가에 버리면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겠거니’ 하고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합니다. 누이를 보내면서 “네가 가 보아라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아 보려고 멀리 섰더니 그때 바로의 딸이 마침 목욕하러 애굽의 강가로 나옵니다.

모세가 누워 있는 하수가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우연의 상황입니다. 고고학자들은 그 당시에 애굽의 궁중에는 훌륭한 목욕 시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나 신기할 정도로 때를 맞추어 이 상자를 발견한 것입니다. 바로의 딸이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를 보니 멸시받는 히브리 노예의 아기였습니다(출 2:6). 당시는 흔한 것이 히브리인의 아이였기 때문에 재수 없다고 그냥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때 바로의 딸이 상자를 열자마자 “아기가 우는지라”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한 주석가는 “바로 이 아기의 울음소리가 공주의 가슴에 잠자던 모성애의 본능을 흔들어 깨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공주는 이 아이를 데려다가 기르기로 결심했고, 유모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모세의 누이가 등장하여 공주에게 유모를 불러다 줄 것을 제의합니다. 공주는 “네가 아니라도 유모는 내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주는 어린 소녀의 말에 순순히 응했고, 모세의 친어머니가 모세의 유모가 되었습니다. 공주는“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하고 말합니다(출 2:9). 잘 길러서 데려오면 그 수고한 값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던 그 무서운 시절에 모세의 부모는 양육비를 받고 보호를 받으며 자기의 아들을 당당하게 기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목숨 걸고 믿음으로 자식을 기른 부모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요 보상이었습니다. 여기에 모세를 살려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가 남자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한 그 핵심 속으로 모세를 집어 넣어 보호받고 성장하게 했습니다. 히브리 남자아이를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의 공주였고, 그 애굽에서 바로의 공주가 아니었으면 모세를 살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장한 모세는 바로의 딸에게 가서 공주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고 나이가 사십이 되었을 때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 볼 생각이 났다고 했습니다(행 7:22-23).

유대인의 교육 방법의 하나는 어린 아기에게 탈무드와 성경을 자꾸 읽어 주는 것입니다.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도 아이의 무의식과 심층 깊은 곳에서 교육이 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어머니의 교육이 애굽 궁중의 40년 교육보다 위대하였습니다. 애굽 궁중에서의 40년 교육이 모세에게서 하나님과 민족을 빼앗아 갈 수 없었습니다. 부모의 교육이 어린 모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던가요?

성경은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히 11:24-27) 하고 강조합니다.

구세군의 윌리엄 부스 대장은 “우리는 마귀보다 먼저 손을 써야 한다. 그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죄를 가르치기 전에 하나님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부쉬넬도 “어린이의 품격 형성에 있어서 세 살이 되면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의 절반이 끝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고 강조합니다. 모세의 부모는 역사를 이루는 믿음을 가지고 모세를 양육했습니다. 모세의 부모가 목숨 걸고 믿음으로 자녀를 양육하여 이스라엘을 살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간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크리스천 부모들도 믿음으로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악한 시대의 물결을 거스르는 살아 있는 믿음이 너무나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태어난 시대에는 바로가 남자아이의 목숨을 위협했다면, 오늘날에는 어둠의 세력이 세속화와 루키즘과 스마트폰의 영향력으로 서서히 아주 치밀하게 신앙을 무력화시키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부모의 신앙보다 자녀의 신앙이 2~3배 더 강해야 10년이나 20년 뒤에 그 시대를 이기고 나갈 것입니다.

먼저 부모가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고 믿음대로 행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자녀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겸하여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며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목숨 걸고 양육하지 아니하면 슬피 울 때가 올지 모릅니다. 여러분 자녀들의 마음 깊은 곳에 예수 그리스도를 심어 놓으셔서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며 천국에까지 이어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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