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를 한다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한 군데 있다. 바로 승천교회당이다. 예루살렘 동편 감람산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는데 마치 경주의 첨성대를 연상하게 한다. 우리 일행이 바로 그곳에서 성경의 사도행전 1장 6절부터 11절까지 읽은 감격은 평생토록 은혜의 샘물이 되고 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 1:9).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는 천사의 음성도 들리는 것 같았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실로 승천교회당은 순례자들에게 영원한 희망을 선물로 안겨 준다. 전능하신 분이 통치하시는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나라이다(계 19:6; 21:1-2).

그런 큰 은혜를 받으면서도 마음속에 의문이 생겼다. 인간에게 지성이 있다는 것이 큰 병통이라 할까. ‘예수님 탄생 때도 구름타고 오셔서 낙하산 부대처럼 사뿐히 땅에 내려앉도록 하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런 질문이다. 좀 항변적 물음이다. 하나님은 능히 그렇게도 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하필이면 십대 동정녀에게서 탄생하게 하셨는가. 자칫했으면 마리아 엄마와 함께 돌무덤 속에서 죽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방법 아닌가. 또 모태에서 출산되실 때 얼마나 고통이 심하셨을까. 구름에서 청년의 몸으로 뚝 떨어져 내리셨으면 헤롯왕의 잔인한 칼에 참수당할 위협도 없었을 것이고, 핏덩어리 시절에 험산준로 이집트로 피난갈 일도 없으시렷다. 그런데 왜 하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을까?

신학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라틴말로 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라는 대답이 있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동정녀 몸에 잉태될 때부터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발자취 하나하나가 정말 ‘피로 물든 발자국’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분의 내 영혼 구출 작전이셨구나’생각하면 사뭇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예수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그 대답이 실로 엄청나게 많다. 아니.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는 그 대답 한 가지를 덧보탠다. 함생의 사람이시다. 함께 생명을 나누는 분이시라는 뜻이다. 어미 연어처럼 자신의 생명을 죽여 수많은 새끼연어를 살려내는 ‘함생의 사람’이 바로 그분이시다.

성부 하나님과 생명을 공유하신 까닭에 부자지간이 되셨고,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신 까닭에 함생 관계가 되셨다. 사람의 몸을 통하여 태어나신 까닭에 사람과 함생하셨고, 원수들의 칼끝 표적이 되셨던 까닭에 원수들과도 함께 사셨다. 그 원수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글을 쓰는 죄인이요 또 이 글을 읽는 죄인들이다.

‘함생의 사람 예수...’ 그분을 생명의 주인으로 모시고 산다면 굳이 성지에 가지 않더라도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진짜 성지는 성경에 있고, 영원한 성지는 바로 예수님을 메시야 곧 구원주로 모신 자신의 영혼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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