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곤함이 가시지 않은 몸은 이불 속에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었다. 반가운 가족들과 회포를 풀고 늦게 잠자리에 든 명절 바로 뒷날인 탓이었다. 일을 하러 가야 하기에 단호히 유혹에서 벗어났다. 준비를 하고 방을 나섰다. 복도를 나오다 멈칫한 난 그만 빙그레 웃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퍼져 나오는 다양한 소리! 코 고는 소리에 자신이 둘러 싸여 있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바로 옆, 어머니의 방에선 친정나들이 한 두 시누이가 어머니를 가운데 모시고 자면서 코오, 코~오, 쌕~쌕~ 코를 골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쩝쩝 입맛 다시는 소리까지 합하여지고, 어머니께서도 이따금 푸아 푸아 화음을 넣으셨다. 그 옆방에선 중학생부터 사회인까지 네 명의 여자 사촌들이 삼단 요를 죽 펴고 쌔근 쌔근 문틈으로 수줍은 콧소리를 몰아내고 있었다.

거실 역시, 소년과 청년의 남자 사촌들이 슬리핑백을 깔고 축구하는 꿈을 꾸는지 뒤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드르릉 드르릉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건넌방에선 아내를 장모님께 빼앗긴 사위들이 천정이 낮다고 크응 크응 힘껏 천정을 들어 올리려는 듯, 소리를 발하고 있었다. 모두가 불편을 개의치 않고 행복한 노래를 부르는 듯했다.

명절을 맞아서, 고작 하룻밤을 같이 하려고 네 시간이나 비행기 타고 왔고, 또 차로 몇 시간을 달려온 가족들이 작은 지붕 아래서 코오 코오, 쌕쌕, 드르렁 드르렁 그렇게 하모니를 만든 것이었다.

명절, 가야 할 곳이 있고, 기다리는 가족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기간이다. 기다림의 절절한 그리움과 만나는 반가움이 주는 설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명절의 기쁨이다. 엄마 말 듣지 않는 아이들을 닦달할 때도 ‘이번 명절엔 사촌들 볼 생각을 말아라.’ 하는 한 마디는 어떤 꾸지람보다도 효과가 있다. 성적이 떨어진 아이를 향하여 ‘성적을 올리지 않으면 할머니 뵐 생각은 말아라.' 엄포하여 보라. 아이는 밤잠을 아끼며 노력을 할 것이다. 그리하여 좋은 결과를 얻으면 얼굴에 함빡 자랑을 담고 할머니 품에 안긴다. 어른들은 돌아가며 머리를 쓸어 주고, 사촌들은 박수를 보낸다. 혹 자랑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올지라도 노력 한 것을 칭찬해 주고 격려하며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게 해준다. 명절의 가족 모습이다.

그날 아침 코고는 소리는 가족 안에 있다는 안도의 소리였다. 이민 사회, 모래알 같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눈 똑바로 뜨고 살았던 삶을 부려 놓는 소리였다. 수많은 경쟁 속에서 긴장했던 순간들을 모두 녹여내는 소리였다. 어떤 직장, 어떤 직책, 또 어떤 사업이든 마음을 꽁꽁 싸고 맡겨진 책임을 묵묵히 수행하여야 하는 삶 속에서 잠시 방심하는 소리였다. 앞을 향해 바쁘게 달려야 하는 이 세상에서 한 점 쉼표가 되는 명절에 ‘가족 안에서 난 지금 두려움 없습니다. 평안합니다.’ 고백하는 소리였다.

기둥 몇 개와 콘크리트로 만든 벽이 적과 바람을 막아 주고, 기왓장 몇 겹의 지붕이 천둥과 이슬을 막아 주고 있었다. 세상의 어둠 속에 들어 있을 모든 위험에서 보호하여 주는 작은 벽, 초라한 벽 이쪽에서 명절 뒷날에 마음을 부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 작은 공간이 우리에게 쉼을 주는 걸까?

먼 길을 가슴 설레며 달려오게 하는 힘, 마음을 놓을 수 있는 편안함은 바로 물리적인 집의 공간이 아니었다. 진정한 쉼터, 가족의 사랑이라는 울타리가 있기 때문이다.

내 진실 어린 기쁨을 토할 수 있는 곳. 작은 자랑도 멋쩍어 하지 않고 오히려 백 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엄마 앞에 뛰는 아이가 되는 곳. 하찮은 성과도 모두가 자랑스러워하는 곳. 내 자랑이 네 자랑이 되고, 네 자랑이 내 영광이 되는 곳. 내 아픔이 우리의 아픔이 되는 곳, 네 슬픔을 내 슬픔으로 바꿀 수 있는 곳. 네 눈물이 우리의 눈물이기에 상처조차 쉽게 치유될 수 있는 곳. 나 혼자가 아니라 소중한 가족 구성원으로 책임과 자존감을 갖게 해준다. 든든한 둔덕, 바로 사랑과 마음이 있는 곳이다.

명절 뒷날, 어둔 복도에서 내 귀에 스며왔던 멜로디. 코고는 소리 속엔 이런 가락이 담겨 있었다.

날이 밝으면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며 돌아가야 했다. 늙으신 어머니께는 따님들의 온기가 오랫동안 큰 위로가 되실 터이다. 떠나가는 따님들도 어머니의 사랑을 한 번 더 가슴에 넣고 갈 것이다. 잠시의 쉼이 부대끼는 생활 속에 큰 활력을 줄 것이다.

바라기는 이런 개념이 한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골목 안으로, 사회로, 교회로 확대되어 서로를 의지하는 공동체가 많았으면 참 좋겠다.

잠시 가슴 벅찬 생각을 뒤로 하고 차에 올랐다. 여전히 코골이 화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가로등의 엷은 빛을 받으며 실루엣만 드러내 보여 주는 작은 집이 세상의 어떤 빌딩보다 크게 느껴졌다. 먼 길 떠날 시누이 가족의 배웅도 뒤로 한 채 새벽별과 눈을 맞추며 일터로 나갈 수밖에 없는 피곤한 나의 삶이다. 복도에서 내 발길을 잡았던 그 흐뭇한 합창은 가진 것 없이 이렇게 가난한 나에게 세상의 주인이 된 기쁨을 주었다.

내 안에 깊숙이 저장된 명절 뒷날의 소리는 지금도 가끔 들려온다. 무기력함과 고단함으로 다리에 힘이 빠질 때, 외로워 나락으로 떨어지려 할 때 산뜻하고 경쾌한 리듬으로 찾아온다. 가뿐하게 발을 옮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준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