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S. 루이스 지음 / 강유나 번역 / 홍성사 펴냄

 
『헤아려본 슬픔』(A Grief Observed)은 저자가 죽은 해인 1963년에 N. W. Clerk라는 가명(假名)으로 출간되었다. 암으로 아내와 사별한 후 극심한 슬픔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회의와 아내에 대한 그리움, 다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깊은 묵상 속에서 써내려간 공책 네 권 분량의 일기다.

저자의 양아들이자 죽은 아내의 친아들인 더글라스 그레셤은 이 책을 "자기 삶에서 가장 충격적인 슬픔으로 인해 감정적으로 마비되는 상태를 파악하고자 하는, 그리하여 종국에는 그러한 마비 상태를 딛고 일어서고자 하는 '한 사람'의 주의 깊은 시도를 적나라하게 펼쳐 놓은 기록"이라고 했다. 또한 "자신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적나라한 감성을 드러내는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 이며, 노골적이리만치 정직하고 꾸밈없는 단순성이 특징이기에 솔직대담한 진실의 힘이 드러난다고 했다.

C. S. 루이스는 독신으로 살다가 미국인 헬렌 조이 데이빗먼을 만나 59세에 결혼했다. 결혼 당시 그녀는 이미 암에 걸려 투병 중이었으며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짐작하면서도 사랑으로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아내의 죽음은 기독교 변증론자로 하여금 믿음을 의심하게 만든다. 하나님에게 분노한다. 아내의 고통에 비하면 자신의 슬픔은 이기주의적이라고 자책한다. 그러나 일기의 말미에 이르면 저자는 다시 하나님께 돌아온다.

C. S. 루이스는 크리스천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기독교 변증가이자 시인, 작가, 비평가, 영문학자이다. 1898년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출생, 1925년부터 1954년까지 옥스퍼드 모들린 대학의 개별지도교수 및 평의원이었으며, 1954년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중세 및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쳤다. 무신론자였던 루이스는 1929년 회심한 후, 논리적인 정신과 명료하고 문학적인 문체로 뛰어난 저작들을 많이 남겼다. 대표작으로 『순전한 기독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고통의 문제』, 『예기치 못한 기쁨』, 『네 가지 사랑』, 『나니아 연대기』 등이 있다. 1963년에 작고했다.

(본문 중에서)

-내게 종교적 진리에 대해 말해 주면 기쁘게 경청하겠다. 종교적 의미에 대해 말해 주면 순종하여 듣겠다. 그러나 종교적 위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당신은 모른다'고 나는 의심할 것이다. 물론 당신이 순전히 지상의 용어로 그려진 '요단 강 건너' 가족의 재회 등에 대해 모두 글자 그대로 믿고 있다면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과 전혀 상관이 없으며, 덜 떨어진 찬송가나 석판화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에는 그에 관한 말씀이 한 마디도 없다. 듣기에도 거짓되게 들린다. 우리는 그렇게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실제란 결코 반복되지 않는다. 그것을 빼앗았다가 바로 되돌려 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심령술사들은 그런 미끼로 얼마나 사람들을 꾀는 것인지! "내세의 삶도 알고 보면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둥, 천국에도 담배가 있다는 식이다. 그래야 우리 모두 좋아할 테니까.

-여름이 지나면 가울이 오듯이, 연애 다음에 결혼이 오듯이, 결혼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죽음이 온다. 그것은 과정의 단절이 아니라 그 여러 단계들 중 하나이다. 춤이 중단된 게 아니라, 그 다음 표현 양식으로 옮겨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연인 덕분에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배운다. 그 다음에는 춤의 비극적인 양식에 따라 우리는 여전히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비록 그 육신의 존재는 사라지고 없어도 연인 그 자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우리의 과거와 추억, 슬픔, 혹은 슬픔으로부터의 위안, 자신의 사랑 따위를 사랑하느라 안주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되돌아 보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H에 대한 추억에 크게 마음 쓰고 있었고, 그것이 거짓되이 변할지 모른다는 점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선지(하나님의 자비로우며 선하심 외에는 달리 생각할 방도가 없다) 나는 더 이상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놀라운 일은 그런 데에 신경 쓰지 않게 되자, 사방팔방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만나다라는 단어는 너무나 강한 말이다.

-거룩한 분의 이미지는 쉽게 거룩한 이미지가 되어 버리며 신성불가침이 된다. 하나님에 대한 내 생각은 신성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시간 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분이 스스로 깨버리신다. 그분은 위대한 우상파괴자이다. 이 깨뜨림이야말로 그분이 현존하신다는 한 가지 표징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성육신’이야말로 그 최상의 사례이다. 그것은 구세주에 대한 이전의 모든 개념을 박살내어 폐허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우상파괴로 인하여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상처 입지 않은 자들은 복이 있나니. 똑같은 현상이 우리의 내밀한 기도 가운데서도 일어난다.
모든 실체는 우상파괴적이다. 지상의 삶에서조차도 세속의 연인은 그녀에 대한 우리의 단순한 개념을 끊임없이 깨뜨리고 승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가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그녀가 힘을 다해 항거하기를, 모든 결점과 모든 예기치 못한 면모를 보여 줌으로 선입견을 깨뜨리기를 원한다. 즉 ‘그녀’라는 확고하고 독립적인 실체를 통해, 그리하여 단지 이미지나 기억이 아닌 이 실체야말로 그녀가 죽고 난 후에도 우리가 더욱 더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이 ‘실체’는 이제 상상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H나 모든 죽은 자들은 하나님과 비슷해진다. 그런 점에서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그 나름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비슷해져 버렸다. 두 경우 모두 내 생각과 열정과 상상이라는 변화무쌍한 허깨비들을 뚫고 지나 사랑의 팔과 손을 뻗어(여기서 눈은 쓸모없다) 실체를 더듬어 보아야 한다. 그 허깨비들 자체에 만족하고 앉아 있으면 안 되며, 그것들을 하나님 대신 숭배해서도 안 되고 그녀 대신 사랑해서도 안 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 자체를, H에 대한 내 생각이 아닌 H 자체를, 그렇다 우리 이웃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우리 이웃 자체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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