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젊어서는 꿈을 꾸면서 살고, 늙어서는 꿈을 먹으며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와 늙은이의 구분은 아주 간단합니다. 꿈을 꾸는 자는 젊은이고, 꿈을 먹는 자는 늙은이라고 믿습니다.

“한 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인가?”

나는 해병 181기이기 때문에 이 물음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1966년 9월에 입대하여 1969년 6월, 34개월만에 제대했습니다. 나이 든 만큼 지금은 왕고참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병대 기수는 1개월 단위로 계산됩니다. 예를 들어 180기는 나보다 1개월 선임이고 182기는 1개월 후임이 되는 것입니다.

1기수 차이가 이등병 시절에는 굉장히 큽니다. 진급하면서 1기 차이는 크게 나타나지 않지만, 기수별로 집합하여 차례로 몽둥이 찜질을 해내려 갈 때에는 1기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지금은 항의들을 많이 하고 또 민지(民志)가 발달하여 군에서 폭력이 없어졌으나 나의 군 시절에는 폭력이 앞섰습니다. 욕설과 함께...

한창 활개치고 놀 나이에, 조직 생활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큰 마음 먹고 해병대에 자원 입대한 사람들이 답답하겠지요. 그들이 명령에 순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니 이때는 몽둥이가 약이 됩니다. 매를 맞으면서 강해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해병대는 해군과 공군처럼 지원제로 병력을 충원합니다. 내가 입대할 당시의 해군과 공군 지원자들은 필기시험도 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들의 지적 수준은 해병대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그 당시 지원자의 자격 요건이 해병대는 신체 건강한 만 18세 이상자로서 학력은 중졸 이상이었습니다. 지금은 해병대 자원의 지적 수준도 높습니다. 해병대는 타군에 비하여 군 복무 기간이 짧았습니다. 24개월만 복무하면 되었습니다. 내가 입대할 당시에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때 사병의 복무연한은 육군 30개월, 해·공군 36개월이었습니다.

대학 3학년 초, 집에 두 번씩이나 정보계 형사들이 왔다고 어머니가 근심 섞인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이미 나는 육군의 신병검사에서, 그 당시 기준으로 보충역에 편입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입대 영장이 나왔습니다. 그것도 해병대로 현역 입대하라는 입영 통지였습니다.

할 수 없이 입대했습니다. 진해의 해병훈련소에 입소하여 다시 신체검사를 하는데 눈이 나쁘다고 약간의 사례만 하면 집으로 보내주겠다는 제의를 의무병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 당시 의무부대는 해군에서 관장했습니다. 그의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내가 왜 해병대에 입대했는지를 알았더라면 그런 제의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의 대기 기간이 있었습니다. 이때의 신분은 민간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군인도 아닌 소위 경계인이었고, 소대장들이나 교관들은 “너희들이 말을 잘 안 들어서 기합을 받고 죽어도 어디에 호소할 수도 없다.”는 공갈과 협박의 말로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이때 머리도 다시 깎고 군번도 받고 군인으로서의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이발할 때의 에피소드가 생각납니다. 소대별로 머리칼을 깎는데, 다 낡은 바리깡을 든 기간병 앞에 앞치마를 두르고 서 있으면 팔걸이가 있는 나무의자에 앉지 못하게 하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게 합니다. 앉으면 의자가 닳는다고 합니다. 또 그 낡은 바리깡으로 사정없이 머리를 미는데 아프다고 하면 즉각 바리깡으로 때리면서 자신의 기술을 무시하느냐고 난리칩니다. 그러면 바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바리깡으로 맞아 보았습니까? 이것도 쇳덩어리기 때문에 무척 아픕니다. 그렇게 곳곳에서 폭력이 난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드디어 입소를 하고 중대와 소대를 나눈 후에 소대별로 소대장과 교관들(중사)이 배치되고 내무반이 배정되면 보급품을 수령하고 군번을 받습니다. 그 후 소대장, 교관과 상견례를 겸한 자리에서 공갈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또 학급의 반장과 같은 “향도”가 있었습니다. 분대별로 분대장들도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각 소대에는 현역 중사들이 소대장과 교관을 맡고 훈련병들이 향도와 분대장을 맡는 것입니다. 조교는 사격장과 각개 전투 훈련장, 집단 샤워장 그리고 유격훈련장 등에만 있습니다.

어라, 내가 소대에서 나이가 제일 많다고 향도로 지명되었습니다. 고생길이 환해졌습니다. 소대가 교육을 받는 중에 소대원들의 교육 태도가 불량하면 대표로 나가 소대원들 앞에서 참으로 많이 구타를 당했습니다. 엎드려뻗친 채 몽둥이 찜질을 당하거나, 주먹으로 얼굴을 맞거나, 아니면 배를 맞거나 했습니다. 주먹으로 친 교관은 단 한 명, 그 자의 얼굴은 제대 후에도 뇌리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태권도를 했다면서 주먹으로 얼굴을 칠 때는 친절하게도 안경을 벗고 이를 앙다물라고 합니다. 배를 칠 때에도 배에 힘을 주라고 악을 씁니다. 이게 어디 군대입니까? 폭력 집단이지요.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립니다. 그자는 지금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그러나 많은 경우에 향도로서 특혜도 받았습니다. 집단 기합에서는 열외를 많이 했습니다. 그때를 돌아보면 웃음만 나옵니다.

자대 배치 후에 휴가를 받고 민간인 목욕탕에 들어가서 보니 엉덩이부터 넙적다리까지 시퍼렇게 피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훈련 기간이 끝나고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도 피멍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2개월 동안의 훈련병 생활에 대한 기억은 구타와 기합 밖에는 없습니다. 연병장은 온통 돌투성이인데 그곳을 주로 낮은 포복으로 기어서, 혹은 뒤로 누워서 양 어깨를 이용하여 연병장의 한 끝에서 다른 끝까지 가는 기합도 선착순으로 하여 5명 이내에 들지 못하면 서너 번을 더 해야만 겨우 멈추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 어깨와 양 무릎은 염증으로 성할 날이 없었습니다. 걸핏하면 선착순이었습니다.

“원산폭격”이라는 기합이 있습니다. 이 기합은 실내와 실외를 가릴 것 없이 실시할 수 있습니다. 두 발을 붙이고 앞으로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땅에 대는데 두 손은 열중쉬어 자세로 등에 대는 것입니다. 이 자세를 잡은 사람을 옆에서 밀면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며 차례로 넘어집니다. 맨 끝에 있는 사람은 쿵 소리를 내면서 옆으로 넘어집니다. 연병장에서 교육 중에도 이 기합을 자주 받습니다. 머리를 땅에 대는 곳에 있는 돌들을 치우더라도 박혀 있는 돌까지 뺄 수는 없기에 머리가 무척 아픕니다.

또 기억나는 기합들은 오리걸음과 쪼그려 뛰기입니다. 오리걸음 기합을 받을 때, 그냥 해도 힘드는데 M1 소총을 거꾸로 머리 위에다 높이 들고 걸을 때는 정말로 죽을 지경입니다. 또 쪼그려 뛰기 기합은 실내와 실외 겸용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양손을 깍지 껴서 머리 뒤에 얹고 토끼 뜀 뛰듯이 깡충 깡충 뛰는데 그때 왼발, 오른발 엇갈려 뛰는 것입니다. 그것들 외에도 악마 같은 기합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저녁에 일석점호(육군에서는 이렇게 말하지만 해병대에서는 “순검”이었다고 기억합니다)가 끝나면 내의 바람으로 쏜살같이 PX로 달려갑니다. PX는 다른 연병장의 바다와 접한 곳에 있으므로 빨리 뛰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허용된 시간 때문이었습니다. 배가 고프기 때문에 사는 것은 딱 하나, 찐빵입니다. 런닝 셔츠에 감싸서 일부는 먹으면서 냅다 뛰어 돌아옵니다. 늦으면 다 빼앗기고 기합을 받기 때문입니다. 무사히 돌아오면 자기 침대 안에서 맛있게 먹는 것입니다.

내무반의 침실은 2층 철침대로 되어 있고, 15개씩 양 옆으로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1개 소대에 한 내무반씩 배정되어 있었습니다. 빵 부스러기, 과자 부스러기들이 쌓이면 내무반이 더러워집니다. 매일 저녁에 쓸고 닦지만 아무래도 더러운 곳이 있게 마련입니다. 내가 속한 소대의 소대장이 당직을 설 때는 자주 이런 기합을 받습니다. 쥐잡기입니다. 이 기합을 받을 때는 내무반이 시끄러워지고 기합임에도 불구하고 낄낄 대고 웃느라고 야단들입니다.

내무반 양 옆으로 2층 침대들이 놓여 있고 중앙은 비어 있어서 전 소대원이 한꺼번에 집합할 수 있는 큰 공간이 있습니다. 전 소대원들을 2열종대로 집합시키고 청소 불량 판정을 내린 후 시작을 외치면 동시에 양 옆의 침대 밑으로 포복을 실시하는 것입니다. 침대 아래의 공간은 아주 낮습니다. 물론 선착순입니다. 선착순에서 낙오된 소대원들은 서너 번을 다시 포복해야만 합니다. 군복은 더러워지겠지만 바닥은 깨끗해집니다.

 
요즘 “진짜 사나이”라는 TV 프로가 제법 인기를 끌면서, 군 생활의 베일이 벗겨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옛날처럼 군대 이야기를 침소봉대할 수도 없습니다. 또 군대의 식당과 일식삼찬에 대한 것들이 가감 없이 방영되고 있으나 이것은 다른 세대 이야기일 뿐 우리 세대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 때의 식당 바닥은 그냥 흙바닥으로 걸으면 먼지가 피어오릅니다. 1개 중대가 한꺼번에  마주보고 2열로 앉아서 먹을 수 있는 목제 식탁과 의자는 무겁고, 넓고, 깁니다. 이런 식탁과 의자가 하나 더 옆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걸핏하면 당직소대장 또는 당직 교관이 식탁 위를 걸어다니면서 위협합니다. 밥 먹는데 시끄럽다, 기합이 빠졌다는 등의 구실로 식사 시작의 구호와 함께 10초 내에 밥을 다 먹으라면서 10을 셉니다. 그 이후에 밥을 먹는 자의 등줄기에는 몽둥이가 날아옵니다. 또 식사 전에 기합이 빠졌다고 그 무거운 식탁을 머리 위로 올렸다, 내렸다 반복하게 합니다. 무슨 목봉 훈련하는 것도 아니고... 이때 당직 교관 또는 당직 소대장은 식탁 위에 올라서 있습니다.

그들의 열성적이고 투철한 정신(?) 때문에 그 알량한 밥마저 다 먹지 못하고, 훈련병들은 허기를 PX에서 산 찐빵으로 채우고 있었습니다. 배식은 개인 배식이 아닌 집단 배식으로, 식사 당번들이 큰 밥통과 국통을 갖고 가서 밥과 국을 받아 와서는 훈련병들이 내미는 그릇에 보리 가득한 쌀밥과 냄새 나는 썩은 도루묵 국을 퍼줍니다. 밥과 국을 만드는 장소를 주개라고 합니다. 식사 당번병이 밥을 더 달라고 하면 밥을 퍼주던 삽의 모서리가 밥통 위로 날아옵니다. 이런 배식 방법은 일반 다른 부대에서도 동일했습니다. 메뉴도 똑같았습니다. 식사 당번은 식사가 끝나면 식기들과 수저들을 깨끗이 닦아서 주개에 반납합니다. 물론 이때에도 주개병이 갖은 이유로 기합 받는 것은 다반사입니다. 일반 부대에서는 식기와 밥통 그리고 국통은 자체에서 보관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나라도 가난했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난했기에 인쥐들이 곳곳에 참 많았습니다. 개인 식별표(소위 개표)를 나누어 주는데 군번과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은 백표를 주고는 사회에 나가서 새겨 넣으라고 합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나는 결국 아무 것도 없는 개표를 갖고 제대했습니다. 훈련 내내 “지까다비(복숭아 뼈를 덮는 높이의 국방색 운동화 - 제2차 대전시 일본 군인들이 신었던 신발)”를 신었습니다. 물론 군화는 보급 받았습니다. 요즘처럼 운동복이나 슬리퍼와 같은 보급품은 없었습니다. 훈련 시에는 훈련복(군복)이 단 두 벌 있었습니다. 쉬는 날에는 군복을 빨기에 바쁩니다. 물론 런닝 셔츠와 빤쓰 그리고 양말도 빱니다. 밖에 있는 간이 수도시설을 사용합니다. 변소도 해변가에 있는 간이 목조 건물로 밑을 내려다 보면 바닷물이 넘실댑니다. 벽에는 온통 낙서가 가득한데 주로 “XX기는 간다. 후배들이여 잘 있거라.”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도통 쉬는 시간을 안 준 것 같습니다. 소대별 또는 중대별로 기마전과 해병 축구를 하고, 지면 졌다고 몽둥이 찜질과 낮은 포복 그리고 선착순 등의 기합을 줍니다.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는 더 두려웠습니다. 군용 모포 한 장 안에 전 소대원이 다 들어가야 하는 기합도 받았습니다. 못 들어가면 몽둥이가 날아오니까, 어떻게든 전 소대원이 그 작은 모포 한 장 안에 모두 들어갔습니다. 포개고 또 포갰습니다. 맨 밑에 있는 사람은 죽을 맛입니다. 그래도 낄낄대곤 했습니다. 나는 향도라고 그런 기합에서 열외가 된 적이 많았습니다.

훈련 마지막 날에는 진해 시내에 있는 천자봉까지 갔다가 오는 구보가 있었습니다. 진이 다 빠진 상태이기 때문에 그 구보는 무척이나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뒤로 하고 2개월간의 훈련소 생활을 떠나 이등병이 되어 다시 각자 1개월 동안의 병과별 교육을 마친 후에 부대 배치를 받습니다. 나는 무선 통신병으로서 병과 교육을 마친 후에 여단본부 통신 중대로 배속받아 와보니 동계 훈련으로 통신 중대는 본부소대 일부만 남아 있고 텅 비어 있었습니다. 배치 받은 신병은 오직 나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내무반은 일자의 시멘트 벽돌 건물이었고, 중간에 통로가 있고 양 옆에 마루가 깔려 있고 벽 쪽에 개인 사물함(선반)이 일자로 나무로 짜여 있었습니다. 건물을 둘로 나누어 뒤는 하사관 침실, 앞은 일반병의 침실로 되어 있는데, 벽 쪽에 토치카 하나가 놓여 있어 난방 구실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무반은 추웠습니다.

며칠 후에 훈련이 끝나고 모두 한 자리에 모여서 순검을 받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내 앞에 오더니 “네가 이번에 온 신병이냐?”고라 하면서 안경을 벗으라고 하더니 뺨을 한 번 세차게 때립니다. 느닷없이 봉변을 당했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다른 중고참이 “참 군대 더럽다. 미안하다. 마음에 두지 말고 잊어버려라.”라고 위로합니다. 부대에 근무하면서 그 두 사람이 누구였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고 그 후에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있었던 부대는 말이 중대이지 그 구성소대가 다양해서 밤에 잘 때 이외에는 서로가 내무반에 들어갈 일이 없었습니다. 전체 인원도 하사관을 포함하여 50명이 채 안 되었습니다. 소대마다 근무지가 따로 있었으니까요. 우리 무선소대에는 12대의 Radio Jeep차가 있었기에 밤에는 그 차들을 지켜야 하므로 동초로 근무할 때에는 이북에서 방송하는 확성기 소리를 듣고는 했습니다. 또 밤에도 음성 통신과 모르스 통신을 체크해야 하기에 무선소대는 동초와 사무실 근무를 야간에도 했습니다.

이제 제대 날짜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는데 느닷없이 1.21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지금은 은퇴 목사가 된 김신조 소위를 포함한 124군부대의 무장침투가 있었습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목을 따러 왔다던 그들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울진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북상하는 도중에 김신조 목사만 빼고 모두 사살 당했습니다. 당시 김신조는 소위로 124군부대의 말단이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제대 일자가 계속 늦어지더니 결국 10개월을 더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앞선 기수부터 복무 기간이 연장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선임 기수들은 불만을 후임 기수들에게 풀었습니다. 힘들었습니다. 나는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내가 선임이 되면 절대로 후임기수들에게 폭력을 쓰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선임이 되었을 때 나 자신과 한 약속을 지켰습니다.

남북한의 관계가 최고조로 긴장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근무 기간 연장은 순전히 정치적 결정이었습니다. 월남전에도 병력 보강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남과 북이 맞붙었다면 누가 이겼을까요? 우리가 이겼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10개월을 더 복무했습니다. 복무개월 수로 보면 내가 더 진정한 해병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해병대가 좋아서 내 발로 걸어 들어간 게 아니고 단지 편법의 부름을 받아 국방의 의무를 다한 것이기에 다른 해병들처럼 “한 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라는 감정을 갖기가 좀 거북합니다. 그래도 그곳을 나왔으니 내 이마에 찍혀 있지 않을까요? 해병대 출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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