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성숙은 무슨 말인가? 영적으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사도 바울은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한다”(엡 4:15)고 권면하면서, 성숙과 비성숙의 차이를 영과 육에 속한 사람에 비유한다(고전 3장과 갈 5장). 평신도 신학의 대가인 폴 스티븐스에게 성숙하다는 것은, 깊고(deep), 훈련되어(discipline), 잘 분별할(discern) 수 있다는 것이며, C.S. 루이스는 한 술 더 떠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비성숙한 그리스도인에 대해,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그에 합당치 않게 사는 사람으로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보다 ‘그는 나쁜 그리스도인이다’라고 하는 것이 더 분명한 표현이라고 했다.

20세기 기독교 복음주의의 거장인 존 스토트는 그의 책 『제자도』에서, 물리적이고 지적인 수준을 넘어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도적적 성숙과 인간 관계와 균형 잡힌 인격을 통한 정서적 성숙, 그리고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신뢰하고 사랑하고 순종하여 그분과 성숙한 관계를 맺는 것이라면서. 성숙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조명했다. 『메시지』의 유진 피터슨은 이런 총체적인 성숙을 영성의 대가답게‘진리를 살아내는 것’이라고 간명하게 말했고, 종파를 가리지 않고 영향력을 행사한 가톨릭 사제 헨리 나우웬은 영적인 성장을 성공지향적인 관점에서 보면 위험하다고 경고하면서, 성령에 속한 삶(영적으로 성숙한 삶)은 판단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헨리 나우웬이 이 정도면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

“어른이 된 후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다음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낙관할 만한 이유도 많지만 그만큼 절망할 점도 많다. 20년 전의 갈등 중 많은 것들이 지금도 갈등으로 남아 있다. 나는 여전히 내적인 평안을 찾고 있고, 다른 이들과의 창조적인 관계를 추구하며, 하나님을 체험하기를 갈망한다. 지난 세월 동안 일어났던 작은 심리적 변화들이 나를 얼마나 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나 자신에게도 없고 누구에게도 없다.”(헨리 나우웬, 『영적인 발돋음』, 두란노, 2011)

기독교 영성의 아버지라 불리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 A.D.)는 신앙을 문자적 믿음의 단순한 신앙과 깨달아 알게 되는 완전한 신앙으로 나눈 뒤, 영적 성숙이란 마음의 정화와 영적인 조명을 통해 주님과의 연합이나 일치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이해했으며, 헨리 나우웬의 책『영적 발돋음』서문을 통해 소개된 7세기의 요한 클리마쿠스는 야곱의 사다리를 영적인 성숙을 위한 30계단으로 세우고,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는 것으로 성숙을 표현했다. 그래서 그는 사다리의 요한이라고도 불린다. 사다리의 맨 위에 예수님이 손을 내밀고 계시고 성도들은 끊임없이 오른편, 왼편의 천사들과 마귀들의 영적인 전투를 이겨내며 사다리를 올라야 하는 것이다. 사다리의 각 단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성숙의 길로 나가는 여정을 말한다. 성숙은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값싼 은혜와 구원에 길들여지고 안도하고 있었던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성숙해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 먼저 왜? 또? 라고 반문할 것이고, 이어서 그렇다면 ‘어떻게’를 두고 고민할 것이다. 정말 우리는 성숙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런 인간적인 노력을 동반한 성숙의 과정에 대해서(가톨릭은 이런 과정을 ‘완덕(마 5:48)’을 추구하는 과정이라고 강조함), 이것이 마치 종교개혁 전 가톨릭 교회의 종교적인 행위였고, 그래서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라고 믿게 된 우리 개신교는 그 어떤 점에서도 가톨릭을 닮아서는 안 된다는, 왜곡된 강박 혹은 구실로 인해 경시해오지 않았는지 반성할 일이다. 이는 마치 자기를 낳아 준 부모가 싫다고 그들을 호적에서 파내 버리는 것과 다름없다. ‘한 번 구원된 자에게 무슨 성숙의 과정이 또 필요한가?’ 그 경시의 결과가 결국은 맨날 제자리걸음인, 영과 육과 싸우고, 세상에 치이고, 결국에는 자기 연민에 빠지고, 무분별한 생활을 반복하는, 마치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에 머물러 있도록 공헌하지 않았던가?

영적 성숙을 논하는데, 엄격한 수행을 강조하는 가톨릭 카르멜회의 창시자인 16세기 영성가 십자가의 요한과 아빌라의 테레사를 빼놓을 수 없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영적 여정에 대해 성(城)의 이미지를 사용해, 일곱 개의 방을 지나면서 점점 더 성의 중앙으로 들어가게 되고, 결국에는 하나님과의 합일에 이르게 된다고, 『영혼의 성』을 통해 말해 주고 있다. 그녀는 영적 순례자들을 위해, 영적 성숙을 위한 어떤 특정한 방법들과 노력을 제시하거나 강조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 점검하게 하며, 궁극적으로 영적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끌림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테레사를 비현실적인 영성가로 치부해선 안 된다. 그녀는 은혜에 합당한 열매, 즉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강조했다.

십자가의 요한은 영적인 성숙으로 가는 길에는 ‘어두운 밤’이 있다고 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이르기 위해서는 이‘밤’을 지나야 한다는 것이다. 밤을 지나고, 밤을 인내하면서 우리의 영혼이 정화되고 순수하게 되며, 결국 하나님과의 합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영적 성숙에서는 하나님과의 합일, 일체가 궁극적인 목표가 된다. “그런즉 이제는 내(우리)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는 고백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 후 400년이 지난 오늘 십자가의 요한이 말한 그‘밤’, 그 ‘고난’은 ‘순종’으로 이어져야만 의미 있는 고난이라고 해석되면서, 21세기의 국제적인 복음전도자 존 비비어는 성숙과 고난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고 전하게 된다. 그는,

“영적 성장은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도 아니고 학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구원받은 지 수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영적으로 미성숙한 아기나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자들 중 어떤 이들은 성경 지식에 해박하고 성경 구절을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지식적으로 많이 알고 있는 것과,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며 살아가는 것은 다르다. 성경을 지식적으로 많이 알아야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바리새인들이야말로 가장 높은 영적 성장을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한 것같이 고난을 당하는 자가 영적으로 성장한다. 그렇다면 영적 성장의 관건이 고난이란 말인가? 아니다. 엄청난 고난을 당했음에도 쓴 뿌리와 절망의 구덩이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도 있다. 이는 결코 영적으로 성숙한 모습이 아니다. 고난 자체가 영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영적으로 성장한다고 말한다.”(존 맥아더 『분별력: 포장에 현혹되지 않는 믿음』, 엔크리스토, 2007)

아, 멀고 더 먼 성숙의 길이여!

* 편집자 주 : 박준형 님은 캐나다, 밴쿠버에 사는 이문화 컨설턴트 겸 저자이며, 미국 인디애나 주의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신학교와 밴쿠버 리젠트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저서로 『볼프강의 글로벌 비즈니스 에티켓 1,2』, 『변화의 파도를 타라 1, 2』,『내 아이 창의력을 키우는 영어 글쓰기』, 『크로스컬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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