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새해 들어 교회에서 전 교인을 대상으로 성경 쓰기를 시작했다. 300여 명 이상의 성인들 중 100여 명 정도가 참가했다. 다들 지난 연말에 교회로부터 노트를 받았다. 나는 연말을 플로리다의 손주들과 보낸 고로 새해 첫 주일에 받았다. 현재 고국에서 뜨고 있다는 성경쓰기 프로그램이라서 기대를 했는데, 종이의 질이 어찌나 좋고 글씨가 얼마나 잘 써지는지 기대 그 이상이었다.

노트를 받아들고 주일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창세기 6장까지 단숨에 써내려갔다. 빨리 쓰는 중에도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말씀을 한참 묵상하게 됐다(2:7). 사람뿐만 아니라 각종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각종 새들도 하나님께서 친히 흙으로 지으셨다는 말에 새삼 흥미를 느껴 한참 생각에 잠겼다(2:18).

흙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지구나 달의 표면에 퇴적되어 있는 물질이다. 백과사전에서는 땅거죽의 바위가 분해되어 이루어진 무기물과 동식물의 썩은 물질이 섞여서 만들어진 물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 흙이 모여 있는 곳을 땅이라고 한다. 영어로 earth라고도 하는데, 흙이나 땅만을 의미한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 자체를 의미하며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을 총칭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흙을 구성하는 것 가운데 흙에 스며들어 있는 물을 결합수라 하고 그렇지 않은 물을 자유수라고 하니, 어찌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을 합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earth는 티끌이요, 물을 품은 흙이면서, 지구 그 자체라는 것이다. 우리말로는 세상이라고도 하는데, 흙은 물론 산과 바다를 비롯하여 흙으로 창조된 우리네 사람들과 온갖 들짐승들과 각종 새들을 포함하고 있으니 영어의 earth보다는 세상이라는 우리말이 훨씬 더 그 의미가 살갑게 들린다. 그러니까 흙은 나는 물론이고 세상 모두를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두가 길었지만 그냥 내가 흙이라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땅, 즉 나의 흙은 대한민국이지만 나는 그냥 흙이다. 즉 내가 태어난 대한민국의 흙이든, 지금 살고 있는 미국의 흙이든, 흙인 내가 서지 못할 곳도 없고, 함께 하지 못할 곳도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흙이기는 한데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흙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저 흙이라면 별로 할 말이 없겠지만 나는 곧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한 줌 흙이라서 할 말이 여간 많은 게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흙수저와 금수저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게다가 자신을 흙수저라고 생각하는 청년들이 자살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부모의 물질적 능력과 환경을 업고 태어난 자는 금수저이고,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난 자는 흙수저라는 말이 세간에 유행되고 있고, 후자는 그러한 자신을 인정하지 못해 자살이라는 성급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혹여 흙수저라는 말을 듣더라도 먼저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 같다. 흙수저인 자신을 당당히 사랑해야 한다. 그때 그는 흙수저가 아니라 금수저가 되는 거다.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는 자를 어느 누구도 감히 흙수저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말은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창세기에 의하면 흙수저라 고민하는 자나 금수저라 기고만장하는 자나 모두가 흙이기 때문이다.

한데 여기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숨어 있다. 인생의 마지막에 흙수저를 들고 있던 자는 흙인 자신과 흙수저가 하나 되는 기이하고도 행복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금수저를 들고 부귀영화를 누리던 자는 죽어도 놓기 싫은 금수저를 떼어놓고 혼자 빈손으로 괴로워하며 흙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금수저를 쥐고 있던 그가 본래도 금이었다면 인생의 마지막에 금수저와 하나 되어 즐거워 노래를 부르며 난리블루스를 추었을 텐데, 하나님은 금으로 사람을 지으신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인생은 금수저의 승리가 아니라 항상 흙수저의 승리인 것이다. 죄인이 간혹 이기는 것 같으나, 결국은 의인이 승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감히 흙이라고 큰소리를 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 손에 흙수저가 들려 있다고 해도 온전히 감사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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