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야고보서 3:17-18).

평화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입니다. 하지만 개신교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기독교가 평화의 종교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평화를 말하면 다원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어쩌면 오늘날 여러 교회들 안에 폭력이 난무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지 모릅니다. 평화를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화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감옥에 가두십시오. 그래도 우리는 여러분을 사랑할 것입니다! 우리 집에 폭탄을 던지고, 우리 자식들을 위협하십시오. 그래도 우리는 여러분을 사랑할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감옥에서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는 우리 시대에 평화를 이룩한 사람의 원형입니다. 그는 평화를 이룩하는 수단과 방식이 비폭력과 사랑이라는 예수님의 복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킹 목사에게 평화를 이룩한다는 것은 어떤 목적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적도 친구로 만드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런 사랑은 견고한 평화를 이룩하는 힘 그 자체입니다. 협상으로 이룩하는 것들은 쉽게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창조적인 방법으로 평화가 관철될 수 있도록 돕는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킹 목사에게는 적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평화로 가는 열쇠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산상설교에 대한 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의 적을 사랑하라는 요구는 몽상가의 바람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절대적인 필수요건입니다. 적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등진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실천적인 현실주의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천적인 현실주의자라는 말은 사실입니다. 그것도 매우 실천적인 현실주의자입니다. 우리가 사회를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이상주의자로 여기고 그분처럼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사랑으로 이 땅에 평화를 심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의 모든 폭력에 저항하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그분은 평화의 왕으로 등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의 사람들입니다. 사랑으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무자비하게 그리스도인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도 그런 그들을 용서하고 불의와 불화의 땅인 이 세상 한복판에 평화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두 가지 큰 특징

야고보 사도는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그것은 위부터 난 지혜가 아니라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인 것이라고 단정한 후에, 위로부터 난 지혜와 그 지혜의 특징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로부터 오는 지혜, 즉 위로부터 난 지혜는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세상을 향해 있던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리게 함으로써 둘로 나뉘어 있던 마음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치유가 일어나고 동시에 온전하게 해줍니다. 그것이 위로부터 난 지혜의 역사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열거하고 있는, 위로부터 난 지혜의 특징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그룹에 속하는 4개의 특징들은 성결(순전함, '하그노스')에 연결됩니다. '화평', '관용' 그리고 '양순'입니다. 또 다른 부류는 긍휼(엘레오스)과 연결되는 것으로 선한 열매와 편벽(차별함) 없음 그리고 거짓(위선) 없음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의 특징 여덟 가지를 열거하고 있지만, 가장 우선되는 특징은 성결, 곧 순전함과 순결입니다. 그 다음이 긍휼입니다. 순전함과 긍휼은 위로부터 오는 지혜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미 1장에서 순결함과 순전함을 잃은 두 마음을 지적했습니다. 시험에 들어 마음이 나뉜 자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지혜라고 조언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긍휼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긍휼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요약하신 구약의 율법의 핵심이며(2:8) 그분이 성취하신 자유의 율법(2:12)의 근본적인 원리로서,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 기준으로 살아야 하고, 바로 이 기준으로 심판 받을 것임을 역설했습니다.(2:12-13) 또한 긍휼은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영역으로 제시됩니다.(2:14-26)

순결함

평화(화평)와 관용과 양순은 순결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덕목들로 볼 수 있습니다. 순결하다는 것은 동기가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시기나 다툼이 동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평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은 흙탕물이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결을 잃은 사람은 평화를 깨뜨리고 악한 일들을 합니다.

평화(에이레니코스)는 마음이 순결한 사람의 첫 번째 덕목입니다. 관용(에피에이케스) 역시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결을 잃은 사람은 다른 이들에 대해 관용적이지 않습니다. 평화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생각이나 취향이나 입지를 존중하지 않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 대해 너그럽지 않습니다.

종교 개혁 이후의 개신교 역사는 '프로테스탄트(저항)'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싸움과 갈라짐의 역사였습니다. 갈라짐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신교인들의 마음이 순결하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갈라진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을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세포들과 같은 존재들로서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고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순결의 세 번째 덕목은 양순(유페이테스)입니다. 양순은 '잘 설득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으로 마음이 열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된다면 얼마든지 순응합니다. 그것이 양순입니다. 마음이 순결한 사람은 평화를 추구하고 다른 이들에 대해 관용하며 하나님의 뜻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양순하게 반응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 즉 위로부터 난 지혜의 덕목들입니다.

긍휼

긍휼에 따르는 덕목으로 선한 열매가 먼저 등장합니다. 긍휼은 당연히 선한 열매를 맺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1장에서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8)라고 선포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긍휼의 사람들이 된다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소자들을 돌보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구현되는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 우리들이 첫 열매이자 선한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긍휼과 선한(아가쏘스) 열매는 같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열매가 됩니다. 긍휼한 우리들로 인해 세상에 선한 열매들이 맺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맺은 선한 열매만큼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서 이루어집니다.

편벽(차별함, 아디아크리토스)은 긍휼과 보다 명백한 관련을 갖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2장 17절 말씀을 통해 '영광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형제들을 외모로 차별하는 것을 긍휼을 행하지 않는 경우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긍휼로 인해 거듭난 존재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긍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조건으로도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 거짓(위선, 아뉘포크리토스) 없음은 긍휼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춥고 배고픈 형제에게 '평안하십시오. 따뜻하게 하십시오. 무엇을 좀 잡수셔야지요.'라고 말만 하고 입을 것도 먹을 것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위선적인 행동입니다.  위선이란 선을 가장하는 태도입니다. 겉으로는 선한 말과 행실을 하는 듯 보이지만, 마음 속에선 다른 판단, 다른 동기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만일 마음속에 참된 긍휼이 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선을 가장하여 겉 다르고 속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상대방을 긍휼히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만을 긍휼히 여깁니다. 자기 가족들만 긍휼히 여깁니다.

주님께서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을 비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질타하셨습니다. 겉으로는 깨끗해 보였지만 그들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마 23:25). 예수님께서는 위선적인 그들에게 “가서 긍휼함을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9:9-13). 위선을 극복하려면, 하나님의 긍휼, 예수님의 긍휼을 받고, 그분의 긍휼의 삶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의의 열매

위로부터 난 지혜를 따라 행하는 자의 결과는 '의의 열매'(카르포스 디카이오수네스)입니다. 먼저 위로부터 난 지혜를 행하는 자는 평화를 짓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위로부터 난 지혜, 즉 하나님의 지혜에 따라 사는 자이고, 평화를 짓는 사람(Peace maker)입니다. 평화를 짓는 사람이 평화를 심을 때, 의의 열매가 맺힙니다. .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잘 알고 있는  '이신 칭의'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는 판결을 받은 당신의 백성들이 평화를 심어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구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의롭다는 선언을 받은 우리는 순결하고 긍휼한 마음으로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으로서, 불화와 전쟁이 난무하는 이 땅에 평화를 심고 평화를 지어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평화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새로운 삶의 방식, 오직 유일한 삶의 방식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평화를 위해 이 세상의 폭력, 가난, 억압, 불안의 종식을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한 종식을 가져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들과 투쟁해야 합니다. 그 투쟁은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산상수훈이 그 대표적인 방식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 사랑의 영원한 표상입니다. 그리고 유무상통하며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존재할 수 있음을 증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로 부르심을 받은 평화의 사람들입니다. 그 평화는 막연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신적인 평화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또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규정하고 판단하는 구체적인 근거이며 지향해야 할 목표입니다. 기독교 자체가 세상의 소망이며 빛이라는 근거를 세상에 보여주는 가시적인 징표입니다. 평화를 호흡하는 그리스도인. 우리가 명심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평화를 짓는 사람들로서 평화를 심어 의의 열매를 맺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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