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 on Spirituality 45

십계명의 처음 4가지 계명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초대하는 계명들입니다. 그 가운데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신 5:12)는 계명은 단순한 쉼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잘 하지 못하는 것이 쉬는 것입니다. 항상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쉬면 무언가 뒤처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쉬지를 못합니다. 쉬는 것이 꼭 게으른 것은 아닌데, 우리는 쉬는 것에 심지어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자신을 잘 돌보고, 쉬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쉼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차선으로 살자

정신과의사 이근후 교수의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책을 보니까, 남들이 자기에게 좌우명이 뭐냐고 물으면 “차선으로 살자”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최선으로 살자”가 아니라 “차선으로 살자”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자기 능력보다 120%를 해내려는 데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자기의 능력보다 더 많은 것을 목표로 세우고 살아가니, 얼마나 자신을 들들 볶으면서 살아가겠습니까? 사실 나를 가장 괴롭히는 사람은 나 자신일 때가 많습니다. 일도 잘 해야 하고, 인간관계도 완벽해야 하고, 남에게도 확실하게 인정받아야 합니다. 이러니 세상을 사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힘이 듭니까? 인간은 자기 능력의 70%를 발휘하는 것을 목표로 세우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것을 용기라고 말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들들 볶는 것을 멈추고, 여유와 쉼을 주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근후 교수는 “차선으로 살자”는 좌우명을 세우고, 자기가 하는 일들에서 언제나 30% 정도의 힘을 남겨두려고 애쓴다고 합니다. 항상 30%의 힘을 남겨두려고 하기 때문에 수많은 일들을 잘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이 말을 기억하는 것이 참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때로 목사는 순교의 마음으로 목회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한 주간의 목회 일정이 설교, 심방, 성경공부, 회의와 모임으로 빠듯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이민교회의 목사가 한 주일에 감당해야하는 설교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30%의 힘을 남겨두기는 커녕 120%의 힘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목사만이 아니라 모든 이민자들의 삶이 이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십계명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쉼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쉼은 혁명적인 생각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그의 책 『쉼과 저항, Sabbath as Resistance』에서 쉼을 실천하는 것을 혁명적인 생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혁명적인 생각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인 이유는 쉼이 생산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한 번 잘 생각해 보십시요. 쉼은 생산에 대한 저항입니다. 우리에겐 무언가를 생산하고 일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어떤 것이든 생산하지 않는 상태는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논리입니다. 이익이 창출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본주의의 정신이 우리를 끊임없이 무언가를 향해 일하도록 만듭니다. 막상 쉬려고 하다가도 내가 쉬지 않고 일할 때에 창출되는 이익을 생각하면 쉬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쉰다는 것은 멈출 줄 알고, 내려놓을 줄 아는 것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아야 쉴 수 있습니다.

또한 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생산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결국은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로 나타납니다. 요즘 사회에서는 무언가 생산적이지 못한 사람은 무시당하고, 버림을 받습니다. 노인이나 아이들이 학대와 버림을 받는 것은 이들이 생산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산에 대한 집착은 또한 다른 사람들의 쉼을 빼앗아 가기도 합니다. 자기가 안 쉬는 것은 스스로의 선택이라지만, 문제는 남들도 못 쉬게 한다는 것입니다. 쉼을 선택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명기 5:14에 그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여기에는 쉼을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종이나 가축은 쉴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안식일에 이들에게 쉴 수 있는 권리를 주라는 것입니다. 착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쉼은 사람들의 착취에 대한 저항이고,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쉼의 영성

그런데 쉼은 여기에서 끝이 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관계를 올바르게 합니다. 쉼의 명령에서 하나님은 출애굽의 구원 사건을 다시 떠올리게 하십니다.“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안식일의 근거가 하나님의 구원 사건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의 진정한 쉼은 하나님 안에서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구원의 은혜에 다시 한 번 감격하고, 하나님께 뿌리내린 삶에서 주는 생명력을 공급받고 있을 때에 우리는 진정한 쉼을 얻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곧 그리스도인에게는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쉼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노래하고, 예배 가운데 생명의 은혜를 공급받는 것이 진정으로 쉬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이 안식일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되는 이유입니다.

쉰다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쉼은 나를 들들 볶지 않고 돌보는 것이고, 쉼은 무언가 이익을 내는 것에 대한 집착을 멈추고 욕심을 내려놓는 훈련을 하는 것이고, 쉼은 또한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지 않고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특별히 쉼은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쉼을 얻는 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이 가르쳐 주는 “쉼의 영성”(Spirituality of Sabbath)입니다. 잘 쉬는 것은 영적인 훈련이고, 쉼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의 삶에는 쉴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이민생활에서 부부가 맞벌이를 하느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 코 뜰 새 없이 일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쉼은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훈련입니다. 쉼의 훈련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직장이나 가정에서 “쉼의 훈련”(Sabbath practice)을 지혜롭게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잘 쉬십시요. 이것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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