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인 의미에서의 분별

분별이란 단어의 히브리 원어는 우리에게 더 넓고 깊은 의미의 해석을 요구한다. 이‘빈(Byn:בין)’이라는 단어는 대략 다섯 가지 정도의 뜻으로 간추릴 수 있다. 첫째는 이목구비의 오관 중에 눈으로, 귀로, 그리고 터치하여 느낌으로 인식하고 분별하는 것을 말하고, 둘째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 셋째는 마음을 돌리는 것, 넷째는 인식하거나 아는 것을 말하며, 다섯 번째는 머리가 총명하거나 신중함을 말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의미가 “분별하는 능력”인데, 이것을 한국어로는 “지혜”나, “명철”이나, “지식”이나, “총명” 정도로 의역하고 있다.

성경본문의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discerning)하고 지혜(wise)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창세기 41:33).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열왕기상 3:9).

헬라어의 신약으로 넘어가면 총 7회 정도 영어의 분별(discern)이란 단어가 직접적으로 사용되고, 6개의 헬라어가 소개된다. 그 중 3개만 소개한다. 분별력을 다루는 책들이 인용하는 디아크리시스(διάκρισις)는 ‘구분, 분별, 다툼’ 정도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 예로, 고린도전서 12:10의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에서 보듯이 영들의 분별을 말한다. ‘의심한다’는 뜻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디아크리노(διακρίνω)는“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9)에 나와 있으며, 신체적인 부위를 사용해 분별의 의미를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에 언급한 디아크리시스(διάκρισις)와 같은 수준의 분별을 말하는 중요한 단어로 ‘시험하다, 승인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도키마쏘(δοκιμάζω)라는 단어가 있다. 대표적인 말씀으로는 로마서 12:2의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가 있다.

신약에서 사용된 분별의 의미를 추적하면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분별’이란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가장 비슷한 표현이 누가복음 12:56(마태복음 16:3)에 있기는 하다.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여기서 한국어본 개역개정에는 ‘분간’으로 표기되어 있어 분별과 동일시할 수 있으나, 영어로는 ‘해석하다’는 의미의 ‘interpret’이고, 헬라어로는 위에서 언급된 도키마쏘에서 파생된 도키마쎄인(δοκιμάζειν)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그토록 중요한 ‘분별’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셨을까? 예수님에게 분별이란 당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과정 그 자체였다. 따라서 토마스 그린이 『밀밭의 가라지』에서 언급했듯이, 예수님의 복음에서 분별은 특정 단어의 설명을 뛰어넘어 당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그리고 제자들의 부르심과 친밀한 양육을 통해 살아 숨쉬는 것이다. 삶 그 자체로서의 예수님의 분별이 바울의 서신서를 통해 구체적으로 연습되고 평가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분별을 정리해 보면,

첫째, 분별은 정의와 선악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종에게 지혜로운 마음(discerning heart)을 주셔서, 주님의 백성을 재판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distinguish)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많은 주님의 백성을 누가 재판할 수 있겠습니까?”(왕상 3:9).

둘째, 진실됨을 아는 것이다. “내가 혀를 놀려서, 옳지 않은 말을 한 일이라도 있느냐? 내가 입을 벌려서, 분별 없이(discern) 떠든 일이라도 있느냐?”(욥 6:30)

셋째, 속마음을 아는 것이다.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살피고(discern)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시 139:3).

넷째,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test and approve) 하십시오”(롬 12:2).

다섯째, 영의 분별을 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영이든지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에게서 났는가를 시험하여 보십시오”(요일 4:1). 많은 기독교 작가들이 이 영의 분별에 대해 말해왔다. 흔히 기독교에서 분별력이라 하면 영의 분별이었다. 그리고 영의 분별의 정도를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느냐에 따라 정통이냐 이단이냐의 시비로까지 확대되었다. 여전히 말이 많은 분야이지만 그렇다고 영의 분별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전서 12:7-11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영의 분별은 은사이다. 여기서 영이란, 선과 악한 영 그리고 사단과 세상과 우리 자신의 정욕까지 포함한다. 그렇다면 은사가 없는 자는 이런 영들을 분별할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성령의 임재를 믿고, 성령의 체험에 열려 있고, 성령의 인도함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에게는 영적 분별의 영 또한 그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따라 온전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선사될 수 있다. 문제는 성령의 오고 감을,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인간이 마음대로 조정하려는 데 있다. 영의 분별은 조심스럽지만 그렇다고 무시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여전히 영적으로 타락해 있고, 우리를 영적으로 공격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영적으로 깨어 있기 위해서 우리는 분별을 해야 한다.

여섯째, 모든 것을 분별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분간하고(test everything), 좋은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데전 5:21). 그렇다. 분별은 모든 것을 시험하고 의심해 좋은 것, 더 좋은 것을 붙잡는 것이다. 『우물 밖에서 찾은 분별의 지혜』의 저자 마리바 던의 말대로, 그 좋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리라.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분별’을 다섯 번째로 말한 영적 분별의 범주에 가두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분별을 ‘누군가’의 은사로 치부해 포기하거나 그런 은사를 가진 자들을 찾아 헤매지 말길 바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차고 넘치는 은사에 더 나은 은사를 덧입히는 것이 아니라(아, 초대 고린도 교회로 돌아가선 안 된다! 성령이 우리 모두에게 역사하시므로 우리 모두에게 이미 은사는 있다.),

『영적 분별의 길』의 저자 엘리자베스 리버트의 말대로, 이미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현존하시는 그 예수님의 영을 따르려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 일상에서의 소소하고 경건하되 오직 주만을 열망하면서, 개인적으로는 기도와 침묵과 느려짐과 단순함과 자기성찰을 통해, 공동체적으로는 나눔과 섬김의 생활방식을 통해 우리는 분별의 은혜를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잊혀졌거나 아직 발굴되지 않은 은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잘못된 동기로 하나님의 차고 넘치는 분별의 은혜가 다른 곳으로 흘러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하나님의 은혜에 굴복하자. 그리고 분별의 지혜를 선물로 받자. 그리고 나누자, 우리들의 공동체를 위해서!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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