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다 안다. 목숨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 말이다. 목숨이 두 개만 있더라도 좀 숨통이 트일 것만 같다. 비상시에 여벌로 쓸 목숨 말이다. 목숨이 둘이라면 초등학생 하나를 남기고 암으로 죽어가는 젊은 과부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목숨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런데 그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 문제는 거기에 있다. 아담과 하와는 먹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 가인은 자존심, 아간과 가룟 유다는 돈에다 걸었다. 다윗은 한순간의 색성에다 걸었고, 압살롬과 아비멜렉은 정치권력에다 걸었다. 자녀에게 걸기도 하고 축구나 야구 혹은 전쟁에 걸기도 한다. 물론 진리 탐구나 예술작품에 온 인생을 불태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건 인생의 겉핥기일 뿐이다. 목숨을 건 대상이 그처럼 여럿 같지만 결국은 하나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자기 자신의 이익’ 바로 그것이다.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 자기 우상화, 자기 신격화이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죄인일 뿐이다. 죄악의 핵심은 바로 자기중심주의 아닌가.

여기에 예수님의 위대하심이 있다. 그분을 그리스도 혹은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확실한 증거는 수난과 부활에 있다. 그분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십자틀에 걸어 놓으셨다. 이스라엘의 종교권력과 로마의 정치권력이 야합해 그분을 처형한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피동적으로 사형처분되신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감히 말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피살되셨지만, 동시에 스스로 선택하신 자살이기도 했다. 일백 퍼센트 피살이고 일백 퍼센트 자살이다. 예수님께서 자살하셨다고 하면 펄쩍 뛰며 반대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그냥 내려오실 수 있는 분이다. 그분 말씀처럼 하늘의 군대를 동원하여 로마 군병들과 싸워 이기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런데 그걸 스스로 포기하셨다. 그래서 피동적 자살로 이해된다.

왜 그러셨을까. 이 글을 쓰는 나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너도 구원하시고 우리 인간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아니 모든 피조물 곧 우주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죽여 모든 피조물을 구원할‘속량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온전한 이타주의자(the human being for others)가 되셔서 절대적 이기주의자를 구원하셨다. ‘너만주의자’가 되셔서 ‘나만주의자들’을 살려내셨다. 자신의 살과 피, 아니, 뼈와 간과 뇌수를 제공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실로 ‘거룩한 자살자’가 되셨다.

이제는 우리들의 차례다. 그분의 말씀처럼 ‘자기를 작살내고, 자기 십자틀을 메고’ 그분을 따라나서야 한다(눅 9:23). 어디에서나 그리고 날마다 그래야 한다. 사람의 생명 하나를 살려내기 위하여 살, 피, 뇌수, 간, 심장, 손과 발까지도 십자가에 걸어야 한다. 이 순간에도 예수님은 엄중하게 물으신다. “너는 네 생명 곧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십자가에 통째로 걸었느냐?” 이 무서운 질문 앞에 감히 무슨 대답을 드릴 수 있을까?

“통째로는 감히 어림도 없고요. 10%는 드릴 수 있겠어요.” 그만한 결단도 대단한 시작이다. 생명의 십일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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