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의 주체로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인정의 문제 1

하나님의 기적과 신비를 믿는다고 해도 상식이나 합리나 이성을 무시할 수 없다. 영성의 대가 리차드 포스터가 그의 명저 『생수의 강』에서 영성은 균형이 중요하다고 말했듯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늘 문제가 터진다. 본인이 결정의 주도권을 쥐는 세상의 논리와는 달리 하나님에게 우리의 문제의 분별권을 우선적으로 맡긴다고 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문제에 대한 우리들의 이성적인 판단과 이해를 포기할 수는 없다. 이제는 하나님이 누구시길래, 어떤 분이시길래 우리의 분별의 주체가 되시며, 우리와의 공동의 분별을 원하시는가를 고민해 봐야 한다.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시길래 우리의 일을 나 같은 인간과 함께, 한치 앞도 못 보는 미련한 자와 함께 분별의 춤을 같이 추려 하시는가? 가톨릭 예수회 전통에서 분별력을 평생 가르쳐온 토마스 그린 신부는 그의 책 『밀밭의 가라지』를 통해 세 가지의 이미지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간략한다.

첫째,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관점

우선 인간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는 몇 가지의 유추가 가능할 뿐이다. 첫째는 ‘하나님이 다 아시고 다 하신다’고 믿는 것이다. 토마스 그린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마치 인형극에 나오는 인형처럼 주인이 흔드는 대로 흔들리는 것이다. 인간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다 아시니 알아서 하신단다. 이래서 하나님이 알아서 분별하고 결정하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니까 그의 결정대로 움직이는 로봇이나 인형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없다. 모든 것은 그분의 뜻이고 결정이다. 인간인 우리는 군소리 없이 그분의 뜻에 따라 살기만 하면 된다. 우리의 노력이 우리의 환경을 더 개선할 수 없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이 이랬다. ‘하나님이 다 하신다.’ 그래서 그들은 늘 하나님의 사인과 기적을 구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만 했지, 스스로 그리고 하나님과 같이 분별하면서 거룩한 하나님과 같아지고자 하는 선한 의지가 없었다. 때로는 자기들의 생각에 취해 독자적으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하는 온갖 불경죄, 즉 하나님의 파라다이스에서 뱀의 유혹에 못 이겨 선악과를 따 먹었고(창 3장), 바벨탑을 세웠고(창 11장), 세상의 왕을 세웠지만(삼상 8:5) 그 결과는 참담했다. 하나님은 무소불위하셨다.

 
문제는 이런 하나님, 즉 모든 것을 알아서 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저주도 원하시는 대로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피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의로운 자인 욥도 그래서 고난을 받았다.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도 축복과 저주 둘 다 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다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언제나 수용과 순종이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에게 욥이 덤빈다. 법정 싸움이라도 벌여(욥기 23장), 누가 맞는지를 가리자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이 보기에 말도 안 되는 불경죄를 욥이 저지르고 있다. 인간인 주제에, 하나님한테 덤벼? ‘네가 할 일은 하나님에게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오늘날까지 유효하다. 주일에 집안일이 있어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다. 십일조를 안 냈는데 사고가 터졌다. 아이가 평소에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시험에서 실수해 대학에 못 들어갔다. 너무 건강한 사람이 갑자기 암 진단을 받았다. 사고로 누가 다쳤다. 이럴 때 ‘우리가(혹은 그가) 하나님한테 뭘 잘못했나, 그래서 하나님이 벌 주셨나?’와 같은 생각이 번개같이 뇌리에 스치지 않는가? 좀 더 크게 보면, 미국이 잘 산다, 한국에 전쟁이 났다, 일본에 쓰나미가 덮쳤다 등 모든 사고와 불행과 축복은 모두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고로 우리가 할 일은 없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저 복 받으면 감사하고 벌 받으면 회개할 뿐…

남의 불행과 고난에 대해 쉽게 이야기한 적이 없는가?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를 쓴 제럴드 싯처는 90년 초 운전 중에 맞은편에서 중앙분리대를 넘어 질주해 오는 음주운전자를 피하지 못해 아내와 장모와 딸을 한순간에 잃어 버렸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나?’를 두고 저자는 오랜 기간 고통스러운 싸움을 했다. 사고 후 11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한다. 누가 이 자에게 그 옛날 욥의 친구들과 같이 조언해 줄 수 있는가? ‘문제는 너한테 있는 거야! 하나님은 완벽하신 분이야! 하나님한테 따지지 말고 회개나 하시지?’

거듭 말하지만,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시고 우리는 그저 순순히 받는 자라면, 이유 없는 고난에 대해서 항변하는 욥과(그리고 제럴드 싯처와) 하나님의 관계는 존재할 수도 없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비인격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의 벙어리 된 피조물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태초에 허락하신 우리의 자유의지는 더 이상 설 땅이 없어진다.

하나님은 태초에 인간을 지을 때부터 그들에게 하나님의 세상을 하나님과 같이 다스려 나가도록 권한을 주셨고, 이후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이 악하든 선하든, 그들의 삶을 섭리적으로 보호하셨고, 그것도 모자라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친히 보내서 구원의 역사를 드러내셨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간들과 관계하며 만나셨고, 간섭하셨고, 슬퍼하셨고(때론 후회도 하셨고), 구원하셨고, 이 모든 행위의 기초에 ‘사랑’을 두셨다. 사랑은 결코 일방적일 수 없다. 사랑은 관계적이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사랑 받는 자(Beloved)’라 칭함을 얻은 것은 그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라는 것 아닌가? 강이 흘러야 강의 역할을 다 하듯이, 사랑 역시 하나님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유동적으로 흐르고 관계해야 완전한 사랑이 된다.

그러니 하나님이 다 하시고 모든 것이 다 예정되어 있으니 우리의 분별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유추는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과잉 포장된 숙명론적인 관점이므로 잘못된 것이다. 이런 관점과 소위 ‘나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졌다’라고 믿는 사주팔자하고 뭐가 다른가? 고든 스미스도 그의 책 『분별의 기술』에서 ‘하나님이 각 개인의 삶에 대한 완벽한 계획, 즉 청사진을 가지고 계시니 우리가 할 일은 그 계획을 외적인 사인(sign)이나 조언을 통해 찾아내면 된다’고 믿는 ‘청사진의 관점’을 제시하면서 불완전한 분별의 관점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형도 아니고, 로봇도 아니고 하나님이 즐겨 두는 체스판의 말도 아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의 도움 없이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을 창조하신 이후에는 우리를 세상을 다룰 자들로 위임해 주셨고, 이런 하나님의 섭리적 과정을 통해 우리와 같이 세상을 공동으로 창조해 나가길 원하신다. 태초에 그랬듯이 우리를 통해 ‘보기에 좋은’ 땅으로 지속적으로 만들어 나가길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 없이는 일을 시작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역시 우리 인간의 참여와 분별 없이 일을 무턱대고 진행시키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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