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 on Spirituality 48 “기다림의 영성 2”

 “기다림의 영성”에 대해서 묵상하는 두 번째 시간, 오늘은 소망이라는 주제를 함께 묵상합니다. 기다림은 소망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입니다. 2000년 전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지만, 이 예수께서 이 세상의 끝에 다시 하늘로부터 오시기를 우리는 소망하면서 살아갑니다.

부활, 완전한 소망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우리에게는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이때에는 이 세상의 모든 불의와 악이 끝장나고, 주님의 온전한 다스리심이 나타나는 순간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또한 죄와 죽음의 권세가 완전히 패배하고, 죽은 자들의 몸이 부활하는 영생의 순간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경험하게 될 부활의 소망은 모든 다른 소망을 넘어서는 가장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문제이고, 모든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인간의 유한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소망은 삶의 최대의 적인 죽음을 넘어서는 가장 완전하고 궁극적인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은 이러한 완전한 소망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됩니다.

『나이듦이 고맙다』라는 책에서 저자인 김동길 박사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완전하게 벗어나게 된 계기를 소개해 줍니다. 김동길 박사는 어릴 적부터 30대까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았다고 합니다. 평양에서의 어느 추운 겨울날, 초등 학교에 가는 길에 얼어죽은 거지의 시신 위에 가마니가 아무렇게나 덮여 있는 모습을 보고서 어린 김동길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후로 학교에 갈 때마다 그 길을 피해 다니면서, 김동길 박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40이 넘어서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완전하게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임종의 순간을 지켜본 다음이었습니다. 최후의 숨을 내쉰 어머니의 식어가는 몸을 자리에 편안하게 뉘어 드린 후에 김동길 박사의 마음에는 갑자기 ‘나는 언제 죽어도 좋다’는 이상한 용기와 기쁨이 번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세상을 떠나시던 그 순간, 어머니의 얼굴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평화롭고 따뜻한 미소를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분명 숨을 거두시고 몸마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지만, 죽음 직전에 어머니의 얼굴에 번지던 그 따뜻하고 반가운 미소는 어머니가 그토록 사모하던 주님의 얼굴을 뵙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동길 박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갈 곳이 준비된 자, 더구나 그 준비된 곳이 정말로 갈 만한 곳, 아름다운 곳임을 어머니의 아름다운 미소는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영혼이 주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곳이 바로 김동길 박사가 말한 우리가 죽음 후에 가게 될 정말로 갈 만한 곳, 아름다운 곳입니다. 비록 몸은 마지막 호흡과 함께 식어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지만, 우리의 영혼만은 죽음의 순간 즉시로 예수님의 곁에 가서 함께 거하다가,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몸의 부활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가졌던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5:55,57). 사망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 모든 힘은 예수님이 주시는 소망 앞에서 그 모든 힘을 잃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이미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고, 장차 다시 오실 순간 이 승리를 완전하게 나타내실 주님이 주시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부활, 현실에서 역사하는 힘

그런데 이 소망은 단순히 미래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소망은 지금의 현실에서 역사하는 힘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라고 질문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께서는 엉뚱한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4-5). 예수님의 이 대답은 동문서답 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질문하였는데, 예수께서는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맹인이 보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들은 종말에 일어날 일들이 현재에 일어나고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중요한 것은 미래의 소망이 지금 현실 가운데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말에 대한 소망은 미래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소망은 언제나 현재를 향해 파고들어옵니다. 소망이 현재를 향해 파고들어오며, 소망은 언제나 현재에서 역사하는 힘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소망은 현재에서 역사하는 힘입니다. 소망은 현재를 넘어서게 하는 힘입니다.

김영봉 목사가 지은 『사귐의 기도』라는 책에는 죽음을 준비하는 기도에 대한 대목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의 삶에는 생명을 위한 기도만큼이나 중요하게 죽음을 준비하는 기도를 드려야할 때가 있습니다. 김영봉 목사는 자신이 다음의 기도를 드린다고 말합니다. “죽어야 할 때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일 힘을 주십시오.” 참 어려운 일이지만, 참 중요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사귐의 기도』가 출판된 지 10년 후에 나온 개정판에서 김영봉 목사는 이 대목에서 한 독자의 편지를 소개해 줍니다. 김영봉 목사에게 편지를 보낸 독자는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로 딸을 잃은 어머니라고 합니다. 그 딸이 죽어갈 때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엄마, 나 죽어가고 있어. 나를 위해 기도해 줘.” 그렇게 어머니와의 마지막 통화를 끝으로 딸은 세상을 떠납니다. 그 어머니는 비통함 속에서 장례를 치르고, 딸을 마음에 묻지 못하고 딸이 쓰던 방에 자주 들어가서 물건들을 만지며 울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딸의 책상에 꽂혀 있던 책들을 들추어서 보다가 『사귐의 기도』의 이 대목을 보게 되었습니다. “죽어야 할 때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일 힘을 주십시오.” 딸이 이 대목에 밑줄을 쳐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딸의 마지막 통화가 생각났습니다. “엄마, 나 죽어가고 있어. 나를 위해 기도해 줘.” 어머니는 딸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저자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엄마, 나 죽어가고 있어. 나를 위해 기도해 줘.” 어떻게 죽음의 순간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면서 “죽어야 할 때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일 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죽음을 넘어서는 궁극적인 소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죽음과 새로운 생명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고는 결코 드릴 수 없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가진 부활에 대한 궁극적인 소망은 우리의 현실을 파고 들어와서 죽음을 넘어서게 하는 힘이 됩니다. 죽음을 넘어서게 하는 힘, 도대체 어떤 다른 문제가 그 앞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원래 가장 힘든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다른 작은 문제들은 보다 수월하게 이겨낼 수 있는 법입니다. 죽음을 넘어서게 하는 소망은 삶의 모든 문제들을 넘어서게 하는 힘으로 역사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완전한 소망이 있습니다. 죽음을 넘어서서 부활의 생명을 주시는 주님 안에 있는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기다리는 자들에게는 이 소망이 현실에서 역사하는 힘으로 나타납니다. 지금 현실의 모든 어려움을 인내하고 넘어서는 궁극적인 힘이 이 완전한 소망으로부터 나타납니다. 부활, 그 소망과 힘을 경험하는 은혜가 독자들에게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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