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요 중에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슬픈 노래가 있다. 미아리 고개는 육이오 전쟁 당시 서울 복쪽으로 나가는 유일한 외곽도로였다. 이 고개를 통해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많은 남쪽 사람들을 강제로 붙잡아갔다. 남편, 부인, 부모형제, 자녀들을 빼앗긴 이들의 슬픔과 한을 노래에 담았다. 그 슬픔은 노래의 제목처럼 단장(斷腸), 즉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얼마나 이별의 고통이 심했으면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이었으랴 싶다. 그런데 실제로 단장에 대한 고사가 있다.
모원단장(母猿斷腸)이라는 고사성어에 얽힌 이야기다. 직역을 한다면 어미 원숭이의 창자가 끊어진다는 이

사자성어의 고사는 중국에서 유래되었다. 옛날 동진(東晉)의 군주 환온(桓溫)이 촉(蜀)을 정벌하기 위해 여러 척의 배에 군사를 나누어 싣고 가던 중이었다. 양자강 중류의 협곡인 삼협을 지날 때 배에 타고 있던 병사 하나가 마침 벼랑 아래로 늘어진 나무 덩굴에 매달려 장난을 치고 있는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포획했다. 그런데 그 원숭이의 어미가 큰 소리로 슬피 울면서 새끼 원숭이가 탄 배를 쫓아 며칠 동안 백여 리를 뒤따라 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강어귀가 좁아지는 곳에 배가 이를 즈음에, 어미 원숭이가 갑자기 배에 훌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자식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너무도 애태우며 먼거리를 죽을 힘을 다해 달려왔기 때문에 배에 오르자마자 죽고 말았다. 어미 원숭이의 그 애절한 울음 소리를 잊을 수 없었던 병사들이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았더니 창자가 도막 도막 끊어져 있었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을 끔찍이 사랑한다지만 원숭이는 유난히 자식 사랑이 극진한 동물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고사를 들으면 참으로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원숭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을 말하자면 그깟 원숭이나 고슴도치의 자식 사랑은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뭐 유명한 어머니 들춰내려고 멀리 갈 것도 없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다 지극하니 말이다. 당연히 내 어머니도 그러셨다.

 
미주 한인교회들은 5월 둘째 주일에는 어머니 주일이라 해서 성대한 잔치를 베푼다. 어머니들을 위한 재롱 잔치를 열고 선물도 푸짐하게 드린다. 목사님은 설교 중에 오늘은 어머니를 안아드리는 날이라고 했다. 평소에 늘 안아드렸던 분이라 할지라도 오늘 한 번 더 안아드리라고 했다. 평소에 한 번도 어머니를 안아드리지 못했다면 오늘 반드시 안아드리라고 했다. 간곡히 부탁을 했지만 내 곁에는 안아드릴 수 있는 어머니가 안 계시다. 금세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느끼며 내 어머니를 떠올려 봤다. 참 그리운 어머니다.

어머니는 견디는 어머니셨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괴퍅하다고 소문난 할머니가 어머니의 시어머니였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되는 인신공격과 모욕을 묵묵히 견뎌내셨다. 웃말 과부와 바람이 난 아버지의 편을 드시느라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홀린 여인을 두둔하는 시어머니의 폭언에도 묵묵히 견뎌내시기만 했다.

어머니는 늘 아파한 어머니셨다. 바람난 아버지의 폭력에 아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떠밀려 댓돌에 머리를 부딪혀 피를 철철 흘리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아프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 아들 중의 한 아들이 이웃 동네의 어른을 두들겨 팼을 때에도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살을 저미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셔야 했다. 이혼한 아들이 마약에 빠져 폐인이 되어가는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보시면서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셔야만 했다.

어머니는 늘 베풀기만 하던 어머니셨다. 종갓집의 큰 며느리로 시집 온 그날부터 자의보다는 타의로 베풀기 시작했다. 하루도 손님 끊일 날이 없었던 시절에 어머니는 자연스레 베푸는 것이 몸에 배셨다. 그 후 어머니는 아버지의 방탕으로 전 재산을 다 날린 후에도 베품을 멈추지 않으셨다. 아홉이나 되는 자녀들이 배를 곯고 있는데도 어김없이 지나가는 거지를 챙기셨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지나가는 스님에게 넘치게 시주하며 기뻐하셨다.

오늘은 유난히 어머니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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