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1).

주되심과 머리되심

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갈가리 찢어진 교회를 하나로 만드는 일에 공헌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개교회적으로도 공동체성을 상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들간의 공동체성(연합) 역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향한 우리의 헌신이 진심으로 행해져야 함을 가르치셨다. 이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주되심) 하지만 성경은 동일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태도는 그의 백성을 향한 우리의 태도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머리이신 그분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그분의 몸에 관한 우리의 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머리되심) 따라서 그의 교회에 대해서는 냉담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섬기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아더 윌리스, 『급진적 그리스도인』)

성경은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머리되심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개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납니다(마 7:21-22, 눅 6:46, 행 16:31, 롬 10:9, 고전 6:17). 그리고 머리되심은 실제로 그리스도와 그의 몸과 연관되어 나타납니다(엡 1:22-23, 4:15, 5:23, 골 1:18, 2:19).

주되심이 그리스도와 성도 개인과의 관계를 통해 나타난다면, 머리되심은 그리스도와 전체 교회와 관련된 표현입니다. 주되심과 머리되심은 따로 분리될 수 없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개인들의 주되신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하나님 백성 공동체에서도 머리가 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더 윌리스의 마지막 질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진지하게 응답해야 합니다.

"그의 교회에 대해서는 냉담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섬기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선교의 목적을 양적 성장과 외형적 번영으로 둔갑시킨 교회들이 축복과 형통함의 약속을 내걸고 이 땅의 거리를 휘황찬란한 십자가의 불빛으로 뒤덮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그들이 해놓은 일이란 그리스도의 몸을 갈가리 찢어놓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 참담한 비극의 원인은 그들이 혹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믿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까맣게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고 유업을 가로챘던 농부들의 말로를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마 21:33-41).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라"(골 1:18).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 인정되고, 이 지상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때 그분이 우주 만물의 머리가 되실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교회의 간판을 내리고, 높이 걸었던 십자가를 내리고서라도,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임을 명심하면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에 순종하여, 모든 교회가 하나 되는 성령의 역사가 이 땅에 일어나기를 소망해 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자기를 위해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 우리들이 모인 교회 역시 우리 몸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할 영적 예배입니다)(롬 12:1).

사도 바울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했을 때 그것은 그들의 기도와 예배를 더 깊이 있게 표현하라는 권고였습니다. 이때 몸은 각 개인을 가리키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고, 또 로마에 있는 여러 가정교회들을 가리키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해석 모두 희생적 삶에 대한 교훈들을 가르쳐 줍니다.

주되심

우선 몸을 가리키는 헬라어 '쏘마'는 보통 신체적인 몸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울은 우리의 전 존재를 드려 하나님과 관계 맺으며 그 결과 이웃 간에도 서로 관계 맺을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드리라는 로마서 6장 13절 말씀과 우리 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므로 성전처럼 다루어져야 한다는 고린도전서 6장 19-20절 말씀과 잘 들어맞습니다.

우리 몸을 드린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그것은  입으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로 예배할 것을 가리킵니다. 수동적인 청중이 아니라 적극적인 예배자가 될 것을 요구합니다. 단순히 머리로만 동의하는 지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말과 태도, 감정과 행동 등 전인적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 몸을 주님께 드린다는 것은 육체적인 일을 함으로써 그분을 섬긴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님을 위해 일을 한다든지, 입원한 환자를 찾아 위로한다든지, 노숙자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준다든지, 장애우를 돌봐준다든지...

세상을 피상적으로 사랑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기도가 발과 손으로 실천되며 경건한 선언들이 사회적 행동으로 표현되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엠마우스 공동체를 설립한 피에르 신부는 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타인이나 스스로 비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간에 근본적인 구분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구분이 있다면 '자신을 숭배하는 자'와 '타인과 공감하는 자' , 타인의 고통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자'와 타인을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싸우는 자' 의 구분이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다수 교회들은 피조 세상의 고통에 민감하지 않습니다. 끝없이 타자들과의 차이를 부각시키고 타자들을 배제시키면서 구원의 방주에 든 '우리'만 강조합니다. 자신들은 구원 받았으니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돌보는 일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건강해야 효율적으로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적당한 휴식, 신중한 영양 섭취, 활기찬 활동은 전 존재에 영향을 끼칩니다. 혈액 순환이 원활할 때 우리는 더욱 창조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일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서로가 각자의 몸을 돌보도록 격려하는 일입니다. 특히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공동체 안에서 예배와 쉼과 성장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생산성 추구에 혈안이 된 현대문화 속에서 교회가 그런 흐름에 역류함으로써, 친밀감과 의미를 상실한 사회의 놀라운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가 가득 찰 때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림으로써 그 사랑에 열정적으로 응답하게 됩니다. 제물을 수식하는 세 형용사들 가운데 하나인 '산(living)'은 하나의 역설입니다. 제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번제물, 곧 죽여서 각을 뜬 고기를 암시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신비는 자신을 기꺼이 포기할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강한 생명력이 나타나도록 역사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동일한 요지의 말을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죽는 삶입니다. 산 제물이 되는 거기에 자유와 기쁨이 있습니다. 자신의 필요나 두려움을 죽음에 넘길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생명의 원천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권고는 기꺼이 드림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사랑 가운데 철저히 내놓을 때 비로소 더 깊은 삶과 돌봄에 뒤따르는 큰 기쁨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온몸으로 표출할 때, 다시 말해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릴 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큰 평화와 기쁨을 알게 되고, 그것을 소유하게 된 사람은 날마다 더 깊은 사랑과 헌신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머리되심

몸에 대해 두 번째로 가능한 해석은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 5절에서 몸을 그리스도의 공동체적 몸으로서의 교회를 지칭하는 것을 볼 때, 1절의 몸 역시 보다 넓은 의미를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수형으로 사용된 그 단어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속한 다양한 가정교회들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이 로마에 있는 가정교회들을 연합하는 것이었기에 이러한 해석은 타당성을 가집니다.

이 해석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요소는 사도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그들의 '몸(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것을 촉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양한 작은 몸들, 곧 교회의 각 부분들을 하나님께 하나 된 전체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속한 모임을 모두 하나님께 드릴 때, 그들은 봉사와 예배를 통해 하나로 모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해비타트 운동과 같은 초교파적인 단체들의 노력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힘을 합칠 때 더 큰 성과뿐 아니라 더 큰 일치감과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다양한 가정교회들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어 세계의 기아, 난민, 정부정책, 부족한 주거환경, 빈곤 국가들의 경제발전 문제를 위해 함께 일하며 싸우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의도적으로 몸을 로마의 가정교회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했습니다. 몸이 가정교회들을 가리킨다는 확신을 주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친근함을 내포한 동사를 선택했습니다. '파라클레오'라는 동사인데 보통 '권하다' 또는 '격려하다'로 번역됩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인가를 요청한다는 의미를 가진 다른 동사와 대조적인 이 동사를 선택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살던 시대에 그 단어는 오늘날 '권하다' '권고하다'는 말이 갖는 의미보다 훨씬 더 공동체적인 의미를 가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은 직접 만나지 않고도 이메일이나 문자 혹은 전화 통화로 얼마든지 권고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 시대에는 개인 간 만남이 훨씬 더 친밀한 형태를 띠었고, '권고한다'는 의미는 직접 상대를 보거나 편지를 보내 이루어졌습니다. 바울의 편지를 받았던 독자들은 사도인 그가 일하는 방식, 자신이 섬기는 사람들을 돌보는 방식에 대해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명령하듯 거리를 두고 하나님께 가정 모임을 드리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에 참여하는 동료 지체로서, 온 마음으로 자신의 몸을 드리는 일에 함께 참여할 것을 권했던 것입니다.

사실 초기 기독교 사회에선 모든 교회들 간의 형제애가 살아 있었습니다. 다른 편지를 보아도 '먼 곳에 있는 형제들에게'라던가 '타향에 거하는 형제들에게'와 같은 표현들이 자연스러웠습니다. 다른 교회의 형제와 자매들을 자기 교회나 공동체의 형제와 자매들과 똑같이 대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주님이실 뿐 아니라 몸인 교회의 주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그가 형제들이라는 애정 어린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각기 다른 집단에 속해 있는 그들이 맺어야 할 관계를 강조할 목적으로 특별한 애정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각 가정교회의 지체들은 모두 형제자매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그들의 동료로서, 그들 자신과 가정교회들을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격려했습니다.

오늘날 형제자매라는 단어는 피상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별 생각 없이 던지는 빈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형제자매이며 서로에게 온전히 헌신된 공동체로 초대받았고,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영원을 함께 할 사람들이지만, 그러한 개념 자체가 교회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다른 교회 교인들을 형제자매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의 '코이노니아'가 사라진 것은 물론, 교회들간의 연합 역시 자취를 감추고 만 것입니다. 그 이유가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교회의 머리되심이 사라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진정한 주님의 제자라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여야 합니다. 교회들이 진정한 주님의 몸이라면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어야 합니다. 내 교회는 없습니다. 네 교회도 없습니다. 모두가 주님의 교회들이며 모두가 주님의 양들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자기들의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자랑하면 주님의 몸 전체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몸의 다른 부분들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머리되심을 회복하는 일은 어려습니다.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이 시대 교회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며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들의 근본적인 정체성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도 복음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들이 간판을 내리고, 하늘을 높이 솟은 종탑도 허물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진정한 형제와 자매로 여기는 영적 각성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일에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참된 하나님 나라의 형제자매들이 되어 복음과 참되고 유일한 소망을 세상에 보여 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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