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로마서 12:9b).

긍정의 힘

지난 몇 년간 기독교 서점에서 가장 오래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한 책은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입니다. 미국에서 이미 베스트셀러가 되어 한국에 상륙한 이 책은 한국에서도 기독교 서적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책일 것입니다. 하지만 『야베스의 기도』와 함께 이 책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는 책입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기독교적으로 합리화해 주는 무늬만 기독교인 내용입니다.

물론 그 책이 주장하는 내용이 부당하다면 사람들의 관심을 그토록 오래 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단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진리와 비 진리의 차이는 끝이 다른 것입니다. 끝에 가서야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안목이란 진리인지 아닌지를 끝에 이르기 전에 알아차리는 능력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려도 그 사실을 전달하기 어려운 이유는 대중은 언제나 쉽고 편한 길 그리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길을 따르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긍정의 힘이 한국교회에 치명적으로 해로운 이유는 한국교회가 본래 가지고 있던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인 추종에 대해 강력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랜 신학적 성찰과 역사적인 고민의 과정을 갖고 있지 않았던 한국교회는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고 있던 미국교회의 가치관과 신학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였습니다.

맹목적인 복종과 헌신은 한국교회의 특징이 되었고, 거기에 한국인 고유의 근면과 열정이 더해져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빠른 기독교 성장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하지만 빨랐던 만큼, 그리고 커진 만큼 많은 허점을 지닌 독특한 기독교 문화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또한 맹목적인 복종과 헌신이었습니다. 힘으로 성도들을 지배하려 하거나 대형교회를 향한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 내세운 것이 바로 맹목적인 복종과 헌신이었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긍정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면 모두가 똑같은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말대로 되기 때문에 좋은 말만 골라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면 그 비판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 말들입니다. 하지만 찾으려고 한다면 세상의 모든 가치관들 역시 성경적인 근거를 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단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는 사실입니다(고후 11:14). 사단이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할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으로 유혹을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긍정적인 사고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긍정적인 사고의 의미는 좋은 것만 생각하고 좋은 것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2:9은 그 의미를 명징하게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맹목적으로 사고하고 복종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성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사용하여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끊임없이 구분해야 합니다. 악한 것을 혐오하고 선한 것에 달라붙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실수가 있더라도 최선을 다해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실수까지도 선의 도구로 바꾸어 주실 것이므로,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크리스천은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긍정의 힘을 믿기 때문에 부정적이거나 악한 일들을 생각하지 않으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불의를 보거나 악을 보고 못 본 척 뒤돌아서도 안 됩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고전 13:6)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혐오할 것과 소중히 여길 것을 분별하여 곤란한 일과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될지라도 당당하게 현실과 대면해야 합니다. 꼬장꼬장하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삶, 참된 진리의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겨내야 할 세상의 시련입니다.

악한 것을 혐오하는!

우리는 모든 악한 것을 혐오해야 합니다. 긍정의 힘을 믿기 때문에 악한 것을 못 본 척하거나 긍정적인 것으로 위장해서는 안 됩니다. 악한 것을 혐오하는 일은 사랑에 위선이 없어야 한다는 권고와 연관이 있습니다. 위선적이지 않은 사랑을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 그 사랑을 망치는 어떠한 악이라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원칙들을 타협한다면 사랑은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오염되어 악화되지 않기 위해 이 일은 사랑하는 일과 똑같이 중요합니다.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와 지체된 모든 다른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태도 안에 어떤 악이 있든지 그것에 대해 단호한 혐오감을 가져야 합니다. "죄인은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라"는 말이 이를 잘 표현해 줍니다. 잘못을 범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가식이 섞이지 않은 진실된 것이어야 합니다. 진실된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지체에게 해만 끼칠 뿐인 악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러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로마서 12:9b가 잘 요약해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실 만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지금 모습 그대로 두시지 않을 만큼 너무도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어떠한 거짓도 없이 전적인 용납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그분의 목적을 거스르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한 것들을 제거하시고 생각을 새롭게 하심으로써 우리 삶을 그리스도의 형상 안에서 기쁨이 넘치는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향해 가져야 할 사랑의 모범입니다. 죄책감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자애로운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그 죄책감의 원인인 죄를 묵과해서는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그런 태도를 갖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 자신을 참되고 적절하게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악한 것들을 더욱 미워하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보다 순수해지기 위해서는 그런 악들을 최대한 멀리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잠깐 수세기에 걸쳐 신학자들이 던져온 신정론과 관련된 어려운 질문 하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선한 분이시라면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물론 악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완벽한 설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자유롭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편을 선택해 왔고 그 선택의 결과 그분의 뜻이 아닌 것, 즉 악이 생겨났습니다.

악을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악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그것을 미워하고 거기서부터 도망쳐 나오는 것입니다. 악을 혐오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 성경은 로마서 12:9을 "모든 불경건한 것들을 혐오하며 사악한 것들에서 몸서리치며 돌아서라."고 확대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악한 것들에 대해 혐오하며 몸서리 치며 돌아설 정도로 단호해야 합니다.

이러한 권고는 일상의 삶에서 날마다 일어나야 합니다. 아주 사소한 악이라도 사랑을 망쳐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만일 친구에게 조금이라도 진실을 왜곡해서 이야기한다면 그 우정은 훼손될 수 있습니다. 아주 사소한 뒷공론도 공동체의 순결성을 더럽힐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서 사소한 부정직이나 가식 혹은 조작들도 사랑을 온전하고 거룩한 것이 되지 못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망쳐 놓는 모든 작은 흠들까지도 전심으로 미워하고 혐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악을 혐오하라! 우리에게는 이처럼 간단명료하고 힘찬 권고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데 까탈스러운 사람으로 비치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또 실제로 상대방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을 이야기하면 대개 사람들의 사나운 반응에 직면하거나 부정적인 판단을 도리어 자신이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은 그것을 용기 있게 말하는 것입니다. 기쁨이 넘치는 삶을 혼자만 잘난 척 하면서 편협한 것으로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순전함입니다. 부도덕성은 기쁨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염된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순수함과 순결을 향해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불순한 것들에 대해 격분을 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일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문화는 싫은 소리 듣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아부가 아니어도 입에 발린 소리들만 넘쳐납니다.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뒤에서 수군거릴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비난이나 몰이해에 직면하게 되더라도 우리는 악을 혐오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을 때 참된 하나님 백성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문화는 은밀하게 불의를 권유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러는데 뭐가 문제냐고 우리를 부추깁니다. 욕망을 은근슬쩍 자극하면서도 그것이 무어 대수로우냐고 꼬드깁니다.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만 손해라는 위협으로 우리의 죄성을 자극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지근한 물속에 담긴 개구리가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속에서 뛰쳐나오지 않다가 익어버리는 것처럼, 이 시대의 문화와 대중매체가 전하는 메시지에 대해 점점 더 무감각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삶의 어떤 영역이 성경적 원칙에서 물러서서 세상과 타협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가치관에 대해, 살고 있는 방식에 대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과 방식에 어긋나는지 부합하는지를 살펴, 악한 것은 어떤 것이든 골라내어 버려야 합니다(살전 5:22). 교회라고 해서 이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얼마나 많은 악들이 횡행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맹목적인 순종을 강요하는 일은 더 이상 우리들의 교회에 발붙일 자리가 없어져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큰 혐오감으로 우리에게 스며든 모든 악에 대해 단호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제가 이러한 이야기들을 강조할 때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목사님, 목사님은 목사님이니까 그렇지요. 목사님은 세상에 나가 부딪히지도 않고 세상 사람들과 경쟁하지도 않잖습니까? 우리는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경쟁하며 살아야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제가 목사 되기 전에 목사님에게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인 저보다 세상 속에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의 신앙이 더 가치 있고 의미가 있다고 말해 줍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것은 참된 기독교 공동체입니다. 이 세상의 악을 혐오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하나님 백성들이 필요합니다. 악을 더욱 혐오하며 피하는 일은 단순한 희망사항이 아니라 훈련된 가능성이자 긴급한 필요성입니다. 혼자서는 그 일을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공동체 동료들의 이해와 격려가 있다면 실천하기가 쉬워집니다. 뿐만 아니라 격려와 지지를 통해 서로에게 힘을 줄 때 진리의 길을 함께 걷는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또 그 기쁨은 우리에게 악을 혐오할 수 있는 더 크고 새로운 힘을 부여해 줄 것입니다.

삶에는 많은 얼룩과 오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악을 혐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악에 대해 능동적으로 싸우기 위해 참된 공동체가 얼마나 필요한지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보다 충실하려는 깊은 갈망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일에 동역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생각과 삶이 우리를 둘러싼 온갖 쓰레기들로 오염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에 꼭 달라붙어 있는!

다음으로 그런 오염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생각과 삶을 선한 것들로 채우는 것입니다. 좋은 것에 꼭 달라붙어 있는 것입니다. 악에 오염될 때 사랑과 기쁨이 망쳐질 수 있듯이, 선한 것들과 긴밀히 결합될 경우에는 깊이가 더해질 수 있습니다. 선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선을 붙들 때 그것은 우리에게 최선의 유익이 됩니다. 우리를 순결하게 해줍니다. 순결이 사랑에 미치는 효과는 우리로 하여금 지체들과 함께 더욱 큰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악한 것을 혐오하는! 좋은 것에 꼭 달라붙어 있는! 이 두 가지 태도에 대해 말하면서 바울은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는 식의 명령형 동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현재분사, 지속적인 삶의 행위를 묘사해 주는 형용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백성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는' 사람들입니다. 악에 대해 지속적으로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에 대해서는 헌신을 매일 새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 백성의 삶은 부정적 영향들은 뽑아내고 건설적인 것들은 최대한 붙드는 지속적인 과정입니다.

여기서 지속적인 과정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완성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당신에게 꼭 붙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끝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기회들이 헛되지 않도록 끝까지 경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들려는 의지와 태도입니다. 때론 세상의 높은 파도에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그것을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선한 것을 꼭 붙잡아야 합니다. 소유욕으로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라 선한 영향력이 우리에게 미쳐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거기에 붙어 있으라는 의미입니다. 그 일을 위해 필요한 일은 신앙 성장을 위한 본이 될 사람들과 교제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꼭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친구나 동역자, 혹은 배우자를 선택할 때 그와 같은 심사숙고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런 만남과 우정은 각기 하나님의 평화와 지혜, 능력과 신실함에 대해 더 깊은 통찰력을 줍니다.

악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때가 많다는 말은,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선한 것을 꼭 붙드는 일에 실패할 때가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선한 성품을 길러주는 인간관계를 발전시키는 일에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선이 위협당할 때 뒤로 물러서거나 원칙이 공격당할 때 맞서 싸우지 않습니다. 선의 기쁨을 꼭 붙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분사의 형태는 다시 한 번 선한 것을 지속적으로 꼭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고지식한 집착이 아니라. 헌신과 신실함을 끝까지 지며가는 사랑을 말합니다. 선에 대한 이러한 헌신은 삶의 다양한 차원에서 구현될 수 있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선을 꼭 붙든다는 것은, 일에 대한 탁월성과 장인정신을 추구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적당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주어진 역할과 은사가 무엇이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과 같은 열정을 갖고 모든 일에 임하는 것입니다. 선을 꼭 붙든다는 것은 자신이 섬기는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며, 책임감 있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시간을 사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살며 일할 때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선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마음의 양식이 되고 긍정적 가치를 담고 있으며 신체와 정신과 영혼을 건강하게 훈련시켜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꼭 붙들어야 하는 선한 것들입니다. 매순간 찾아오는 선한 것들을 꼭 붙드는 법에 대해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즐거움을 느끼는 감각을 회복하는 것, 매순간 우리 주변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움의 풍취와 향기와 색깔을 감상할 줄 아는 것,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사물들을 느끼며 사소한 것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현존을 알아채는 것 등등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선한 것에 대한 헌신을 통해 우리의 사랑과 기쁨이 커지게 할 수 있는 방법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헌신이라는 말을 찾아보기 어려운 오늘날의 비극적인 현실입니다. 이기적인 이익 외에는 신경 쓰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헌신이라는 단어는 낯선 단어이며 구시대의 유물 같은 느낌을 주는 말입니다. 인류에게 오래도록 소중하게 여겨지던 가치관들이 사라지고 친밀한 인간관계가 사라진 후에 드러나게 된 특징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사회를 위해 열정을 바쳐 헌신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덜떨어진 사람들이 하는 일처럼 여겨지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필요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 되는 것이 현명하다는 사고가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헌신의 결여는 삶을 불안정한 것으로 만들고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과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서로에게 헌신하지 않는 배우자들은 더 나아 보이는 상대가 나타나면 너무 쉽게 자신의 배우자를 버리고 맙니다. 학교 안에서도 헌신하지 않는 아이들은 목적의식이나 방향성 없이 이리저리 방황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어야 할 그리스도인들 역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돌보는 참되고 온전한 사랑으로 서로에게 헌신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지금이야말로 복음이 제공해 줄 수 있는 대안, 즉 서로를 위해 기쁘게 헌신하는 기쁨의 삶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해 서로에게 헌신되어 있는 사람들은 우정을 꼭 붙들 수 있습니다. 인간의 충성과 사랑은 우리를 실망시킬 수 있어도 그분의 사랑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본회퍼는 당신과 나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 지체들이라면, 본회퍼가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이음줄이 되신다면 우리는 결코 상대방을 실망시키지 않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한 것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울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배로운 것들에 대해 감사하게 됩니다. 선한 것을 소중히 여길 때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기쁨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매일 우리가 어떤 것을 가까이 하는지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매순간 자신을 어떤 방향으로 변화시킬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선을 꼭 붙들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배울 것인가 아니면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무난하게 지낼 것인가? 우리의 기쁨이 악에 의해 손상되도록 할 것인가 아니면 선을 통해 더욱 커지도록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물음으로써 선한 것을 소중히 여기는 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균형 잡힌 신앙을 향하여

그렇다면 악한 것을 혐오하는! 좋은 것에 꼭 달라붙어 있는!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 질문 자체가 어리석습니다. 이 둘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는 언제나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긍정의 힘을 믿기 때문에 악을 보고도 혐오하지 않는다면,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척한다면, 적당히 타협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코 좋은 것에 꼭 달라붙어 있는 선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늘 깨어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면서 자신을 위해, 서로에게 속한 지체의 유익을 위해 우리에게 다가와 있는 악의 실체를 발견하고 그것을 혐오해야 합니다. 동시에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늘 살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분변하며 거기에 꼭 달라붙어 있기 위해 주어진 기회들을 살려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생동감이 넘치고 우리의 인격이 날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 성숙할 것입니다. 지체들 간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헌신이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가 세상의 빛이 될 것입니다.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손길이 될 것입니다. 그런 기쁨에 넘친 공동체를 보고 사람들은 기꺼이 복음 속으로 뛰어들 것입니다.

악한 것을 혐오하는! 좋은 것에 꼭 달라붙어 있는!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이 두 마디 기준으로 결정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과거와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복음의 횃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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