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盡人事待天命)고 하는 좋은 말이 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는 그리 훌륭한 말이라 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이 먼저이지 우리의 일이 먼저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명확히 구분해내기는 쉽지 않다.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할 수 있다는 말도 간혹 듣는다. 그러나 이 역시 성경적으로는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가끔 세상과 기독교가 다를 뿐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본다. 그러나 세상과 기독교는 다름의 문제가 아니라, 맞고 틀리고의 문제이다. 기독교는 항상 맞고 세상은 항상 틀리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문제도 다름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불합리하게 보이더라도 성경적으로는 추호도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불합리하다고 여겨지는 대표적인 예로 주님께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으시려고 멀쩡한 양 아흔아홉 마리를 들판에 버려 둔 처사가 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처구니없고 불합리하게 보이겠으나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그것이 진리인 것이다. 들에 있는 양 즉 예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도 소중하고, 길을 잃고 헤매는 한 마리 양도 소중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살고 있다 보니 우리 기독교인들도 간혹 세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사건을 대할 때가 있다. 주님의 가르침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주일예배의 대표기도 순서를 맡은 장로님이 예배에 출석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교회 안이 약간 술렁거렸다. 주일 오후에 그 장로님을 만나서 이유를 들어 보았다. 주일 아침에 교회로 오려고 하는데 전화가 왔다고 했다. 어느 여성도가 다급한 목소리로 도와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부부에게 이혼의 위기가 닥쳤는데 남편이 집을 나간다며 짐을 싸고 있으니 오셔서 말려달라고 애원하여 추호의 망설임 없이 차를 돌려 그 집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 집에 들어서서 남편을 설득하기보다는, 마치 설득을 당하러 간 사람처럼 두어 시간 남편의 씩씩대는 소리를 들어 주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 남편이 진정되는 기미가 보여서 함께 기도해도 되겠느냐고 하고 눈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 시간이 넘도록 눈물범벅이 되며 정말 그 가정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했다고 한다. 결국 장로님이 도착한 지 서너 시간쯤 되자 남편의 마음이 완전히 녹아 내렸다고 한다. 진심이 통한 것이다.

남편은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며, 제 잘난 맛에 그리도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줄 알았는데 자기네 가족의 아픔에 이렇게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며 울어 주는 사람이 있는 곳인 줄 몰랐다면서, 자신이 괜히 못 되게 굴었다고 사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혼 후 처음이었다고 한다. 자신을 위해, 아내를 위해, 자신의 가족을 위해 자신들보다 더 가슴 아파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남편이 말했다는 것이다.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 당신을 위해 이렇게 진심으로 울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울 뿐만 아니라 부럽기까지 하다”며 남편은 아내에게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아무리 돌이켜 봐도 자기 뒤엔 그럴 만한 사람이 없어 부끄럽기까지 하다고 남편이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장로님은 부부와 함께 한참을 울고 왔다고 했다.

부부가 화해한 것은 물론, 불신자인 남편이 그 다음 주부터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건이 있던 그날 그 시각, 교회에서의 사정은 사뭇 달랐다. 교회의 장로가 이렇게 쉽게 주일예배를 빼먹을 수는 없다며 열변을 토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대표기도를 맡은 장로가 너무 무책임하다며 성토하는 교인도 있었다. 심지어 예배 끝나고 목사님과 함께 갈 일이지 저 혼자 일부러 잘난 척하려고 달려간 게 아니냐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다행히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부류들에 끼지 않았다. 처음부터 잘하는구나, 참 멋있다고만 생각했다.

몇 달이 지났다. 그 남편은 한 주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출석했다. 남편이 교회에 출석하고부터 그 여성도가 과부인 줄로만 알았다가 저렇게 좋은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교인들은 신기해했다. 자초지종을 들어 아는 몇몇 교인들은 “세상에 저렇게 다정한 부부도 있구나” 하는 사실을 신기해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는 장로님이 나와 가까운 분이라는 사실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교회의 예배가 대(大)이고, 부부의 이혼 위기가 소(小)라 해도 그 소(小)를 전혀 소홀히 여기지 않은 장로님이 내 지인이라는 사실이 정말 자랑스럽다. 아울러 그 장로님이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을 뿐, 그 시간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가 한 일이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였으니 말이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