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세계

인간은 누구나 근본적으로 가난한 존재입니다. 궁극적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충족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간에게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스스로 충족할 수 있는 존재인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힘을 강화해 나가며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냐 돈이냐는 질문은 바로 그런 인간의 실존을 정확히 지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돈은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분명하게 구분하셨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하나님을 택하면 돈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히 여기고 돈을 경히 여겨야 합니다. 돈을 경히 여긴다는 것은 일단 가난을 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일단이라는 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일단 가난을 받아들이는 것을 대책 없는 가난이 고착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주님은 염려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반문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제자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인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난해지고 비참해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필요한 것을 공급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가난에 관한 제 글에 달렸던 댓글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환경에 내 삶의 안정을 두지 않고(재물) 오직 주님께만 안정을 두는 삶, 이론으로는 백 번도 끄덕이지만 환경에 변화가 올 때, 격하게 흔들리는 저를 볼 때마다 환경이 어떻든 주님께만 안정을 두고 주님만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은총으로 여겨집니다.

알지만 여전히 두렵기 때문에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솔직한 고백입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자신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을 말하고 있거나 아니면 일시적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런 분은 치료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엄청나게 험하고 두려운 곳입니다. 그래서 가장 실존적이라 할 수 있는 불교에서도 이 세상을 사바세계(고통이 많은 세상)라 하고 인생을 고(苦)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사는 토대인 세상이 이처럼 사바세계이기 때문에 고인 것입니다. 물 위를 걷다, 넘실대는 파도가 두려워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던 베드로처럼 우리는 언제라도 세상 속으로 함몰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늘 세상의 위협을 받고 언제라도 실족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신앙은 바로 그런 자신의 실존을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산당

이스라엘의 산당 역시 그들의 그런 불안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40년 광야생활을 마친 후 그들은 요단강물이 갈라지는 기적과 자신들이 농사짓지 않은 곡물을 수확하는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여리고성과 같은 여러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런 모든 일들을 기억하지는 의미로 갈라진 요단강에서 열두 개의 돌을 가져다 기념비로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배웠습니다. 문제가 발생하고 위기가 닥치면 그들은 하나님께 의뢰하였고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시고 먹이셨습니다.

여러 이유로 가나안 부족을 모두 몰아내지는 못했지만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의 주인으로서 그 땅에 정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그들은 가나안 부족들이 자신들보다 더 농사를 잘 짓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소출이 더 풍성한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땅의 풍토에 익숙했고, 오랜 경험이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눈에는 비의 신인 바알과 다산과 풍요의 신인 아세라와 같은 가나안 부족들의 토속신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가나안 부족의 수확의 비결은 그들 이방신들에게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농사에 절대적 영향을 주는 비와 풍요는 그들이 바라는 것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자신들의 주거지와 멀리 떨어진 산에 이방신을 섬기는 처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그 일이 십계명을 어기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속으로는 그 일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았지만 현실의 필요는 그 생각을 무의식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억압이라는 방어기재가 발동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을 통해 산당이 잘못된 것이라는 경고를 여러 차례 반복해서 들었지만 이스라엘의 어느 왕도 산당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4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광야라는 극한 가난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양육되었고, 그것을 잘 기억하는 것 같았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순수하지 못한 신앙인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간음'이라는 말로 표현하셨고, 호세아서에서처럼 돌아오라고 호소하셨지만 한 번 떠난 그들의 마음은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호와의 전 가운데 '미동의 집'이 세워지고, 여호와의 전 안에서 아세라를 위하여 휘장을 짜기까지 하였습니다(왕하 23:7).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만 의뢰한다는 것이,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우리에게 명징하게 보여줍니다.

새 이스라엘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왜 새 이스라엘이 되었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실패하였습니다. 그들이 실패한 이유는 다름 아닌 재물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고자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재물을 섬기자 각종 불의와 불평등이 만연하였고, 이스라엘은 형재애가 사라진 무정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불순종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을 찾고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이제 민족이라는 큰 공동체가 아니라 그보다 아주 작은 제자공동체를 통해 당신의 제자들을 빚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훈련시키는 방법을 바꾸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제 새로운 이스라엘은 작은 공동체, 서로가 이름을 부르며 교제할 수 있는 작은 무리들을 통해 양육됩니다.

그들이 성령공동체를 이루어 유무상통하며 함께 사는 것을 새 이스라엘의 새로운 교회이자 곳곳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로 삼으셨습니다. 가라지와 알곡이 섞여 있고 밀가루 서 말에 넣은 누룩처럼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부풀어 오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제자의 길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을 단순히 심리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으로 오해합니다. 소유가 많은 자들은 결코 자기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 10:25)라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28)라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명하신 가난을 심리적인 문제나 영적인 문제로 에둘러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오래 전에 팔복을 설교할 때, 한 권사님이 "마음이 가난해야 한다는 것이지 진짜 가난해져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요?"라고 제게 했던 질문이 생각납니다. 저는 "물질적으로 가난해도 심령이 가난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심령이 가난한데 물질적으로 가난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라는 대답을 드렸습니다. 지금도 제 대답은 마찬가지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지는 길에서 물질의 가난은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할 기초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초기 교회 성도들은 이 사실을 가장 중요한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 찬가'로 알려져 있던 빌립보서 2장 5-11절 말씀을 찬송으로 부르며 주님을 닮고 주님의 길을 따르고자 애를 썼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오늘날 신학자들은 이 본문을 '케노시스(자기 비움')'로 설명하지만 이 또한 초점을 흐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본문은 단지 사변적인 신학의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가난한 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가난의 극점인 십자가를 지나셨습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이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짧지만 기독교 신앙의 기승전결이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도 초기교회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이 본문을 모든 것을 버리라는 주님의 명령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마저 계시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십자가에서도 영혼을 아버지께 의탁하는 주님의 모범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은 이처럼 주님과 같이 가난해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샬롬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뢰하기 위해 기꺼이 가난해지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부인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떨까요?

선택은 오직 스스로의 몫입니다. 하지만 그 선택은 공동체로 드러납니다. 가난에 대한 개인적인 선택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라는 새로운 교회, 새로운 사회로 이어집니다. 가난을 개인적으로 극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변함없이 개인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서 개인의 문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문제를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하는 순간, 그것이 무엇이든 해결될 것이며, 그 문제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성령의 초자연적인 돌보심과 보호하심이 있을 것입니다. 성서는 이런 상황을 '샬롬'이라고 합니다. '샬롬'이란 하나님의 통치에서 이루어지는 결핍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를 이르는 말입니다.

샬롬에 이르는 길은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은 기꺼이 가난을 받아들인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진다는 이 명확한 성서의 진리를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사바세계에도 샬롬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안녕과 치유, 건재함, 호의, 고요한 영혼, 순례, 행복 그리고 사회적 조화는 서로를 보충해서 온전하게 해주는 구성요소들로 하나이며 동일한 샬롬이다. 이것은 정치, 사회, 자연 그리고 신학이 모두 다 들어 있는 성서처럼 나뉠 수 없다. 하나의 하나님 아래에 있는 단 하나의 세계질서의 부분들이다." (핀차스 라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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