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 on Spirituality 54

오늘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오래 참음, 곧 인내에 대해서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인내라는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삶에서 이루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떤 분들은 인내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만큼 무언가를 참고 기다리는 것은 죽기보다 힘든 일입니다. 왜 참고 기다리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까?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에 인내는 효율적이지 않은 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빠르고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무언가를 참고 기다리는 것은 답답하고 효율적이지 않은 일로 보입니다. 게다가 인내는 주도권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일입니다. 내가 어떤 일의 주도권을 남에게 빼앗기고,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참고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인내에서 느끼는 이러한 무기력감이 인내를 죽기보다 힘든 일로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인내

이렇게 인내가 가장 힘든 일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성경은 성령께서 이루시는 인내의 열매를 맺으라고 말합니다. 이 인내를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하나님의 인내를 본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내를 본받을 때에 우리 또한 인내의 열매를 맺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시기에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이 오래 참지 않으셨다면 우리 중의 그 누가 하나님 앞에 서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인내는 하나님이 우리를 효율적으로 대하지 않으심을 보여줍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얼마나 효율적인 분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죄악에 대해서는 주저하지 않고 벌을 내리시는 효율성으로, 또 우리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을 확 돌려놓는 효율성을 보일 수도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한없이 기다리시는 효율적이지 않은 방법을 택하시고, 우리에게 언제나 자유를 주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두 아들의 비유의 나오는 아버지와 같은 모습입니다. 둘째 아들이 재산을 가지고 집을 떠난다고 했을 때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품을 떠날 자유마저도 허락해 줍니다. 이 자유를 주는 것과 주지 않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프로그램을 심어서 주인 마음대로 통제하는 로보트처럼 우리를 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주도권을 주시고, 자유를 주시고,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도록 지금도 기다리는 분입니다(사 30:18). 하나님의 비효율성은 우리를 향한 사랑에서 나옵니다.

시속 3마일의 하나님

고스케 고야마라는 신학자는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시속 3마일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하이웨이에서 시속 70, 80마일로 달리지만, 하나님의 속도는 시속 3마일입니다. 고스케 고야마는 하나님이 이렇게 비효율적인 속도를 가지고 계시는 이유는 우리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천천히 걸으십니다. 그분이 사랑이 아니라면 훨씬 빨리 갔을 것입니다. 사랑은 나름의 속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속도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해 있는 기술의 속도와는 전혀 다른 속도입니다. 이것은 느리지만 사랑의 속도이기에 다른 모든 속도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속 3마일의 비효율적인 속도로 가시는 이유는 이것이 사랑의 속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인지라 창조주 하나님께 속도를 맞출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도를 맞출 수 없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조를 맞추시는 속도가 바로 시속 3마일입니다. 이 속도는 비효율적이고 느린 속도입니다. 하지만 고스케 고야마가 말하듯이 이것은 사랑의 속도이기에 세상의 모든 속도를 뛰어넘는 최고의 속도입니다. 
 
인내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속도를 맞추어 주시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과 속도를 맞추는 것이 인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속도를 본받아서 우리 또한 사랑의 속도로 보조를 맞추는 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이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되는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사실 이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어떤 목표를 향하여 효율적으로 달려가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가기 위해 속도를 맞추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속도를 배우지 못하면 “한 마음과 한 입으로 예배하는 하나되는 공동체”(롬 15:6)를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랑의 속도를 배우면 가정이 회복됩니다. 사랑의 속도를 배우면 교회가 회복됩니다. 그래서 인내는 회복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뒤집기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속 3마일로 가시는 것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에는 비효율적인 모습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언제나 새 일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비효율적인 모습에서 새 일을 이루신 대표적인 사건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에 세상에서 최고의 비효율적인 방법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의미없는 죽음이고, 완전한 실패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는 걸림돌(고전 1:23)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방법이 나타났고,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가장 약해 보이는 십자가에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의 뒤집기”가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세상의 지혜와 권세, 죄와 사망의 권세가 십자가라는 가장 비효율적인 사건 속에서 패배하는 하나님의 뒤집기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하나님의 뒤집기를 붙잡는 사람들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그의 책 『목회자의 영성』에서 “전복적 목사”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전복적”이라는 말은 무언가를 뒤집어 엎는다는 뜻입니다. 목사는 바로 뒤집어 엎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자신을 뒤집어 엎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세상을 뒤집어 엎는 사람입니다. 목사는 이미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우리의 삶을 뒤집어 엎도록 사람들을 도와 주고 훈련시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목사만 할 일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전복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전복적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내 삶을 뒤집어 엎는 것입니다. 전복적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뒤집기를 붙잡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죄의 문제, 육신의 고통, 삶의 어려움에 시달리지만, 십자가에서 나타난 승리가 나의 삶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종말에 완성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뒤집기를 붙잡는 것입니다. 전복적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지금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내 삶에 하나님의 새 일이 나타날 것을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인내의 자리가 있습니다. 인내는 이러한 소망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인내는 맹목적으로 참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내는 신뢰 가운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내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뒤집기를 붙잡으며, 삶의 고통과 죽음마저도 소망 가운데 넘어서는 것입니다. 인내는 하나님이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새 일을 이루시는 분임을 신뢰하며(사 43:19), 삶의 모든 실패와 패배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소망 가운데 견디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의 열매를 맺는 사람은 하나님의 뒤집기를 붙잡는 전복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인내 가운데 우리는 마침내 승리와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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