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 전에 YMCA에 운동을 하러 갔습니다. 남자 탈의실로 들어가려는데 한국분으로 보이는 할머니와 손녀가 문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4살 쯤 되어 보이는 똘똘한 손녀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자꾸 남자 탈의실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난감해져서 안 된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영어로 떼를 쓰는 손녀와 한국말로 안 된다는 할머니가 안쓰러워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쁜 공주님에게 왜 이곳에 들어가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아빠가 전에 들어가는 것을 봤고, 오늘은 할머니하고 같이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곳은 boy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니까 girl이 들어가면 많이 놀라고 싫어할 거야. 저기 들어가서 유치원 친구를 만나면 어떻게 할래?” 그러자 공주님의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잠시 고민하더니 “할머니, 나 저기 안 갈래”하고는 할머니의 손을 끌고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너무 귀여워서 한참 미소를 지었습니다. 운동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자 탈의실 앞에 서 있는 할머니와 손녀는 각각 다른 마음의 경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들어갔으니 나도 들어가고 싶어요.”라던 손녀는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아빠도 했다”는 것이 그 근거입니다. 그것은 사탕을 먹고 싶다, 혹은 주사를 맞기 싫다는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어릴 적 비슷한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반면 할머니에겐 분명한 경계가 있습니다. 그곳은 남자들이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는 곳입니다. 여자들이 갈 곳은 따로 있습니다. “하고 싶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라는 기준이 있고, “하기 싫다”가 아니라 “하며 안 된다”는 기준이 있는 것입니다. 사회가 공동으로 합의한 기준이 할머니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굳이 남자 탈의실 앞에 “이곳은 남자들이 들어가서 옷을 갈아 입는 곳이니까 여자들이 들어오면 안 됩니다”라는 팻말을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 정도의 판단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과 그 할머니의 마음에 분명한 경계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장한 성인의 마음 속에 있는 경계입니다.

공주님의 기준은 바뀌어야 합니다. 지극히 개인화되어 있던 경계가 몸과 마음이 성장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합의한 기준에 동의하게 됩니다. 모두 함께 유익함과 편안함을 누릴 수 있도록 ‘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 ‘해야 하는 것’을 선택하고, ‘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됩니다. 일일이 말해 주거나 표시하지 않아도 마음 속에 놓인 경계를 따라 삶을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부모는 성경적인 경계를 자녀들의 마음에 잘 심어 줄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믿음과 선한 양심이 세상에서 만나는 유혹과 시험에 대한 경계가 되어야 합니다.

요즘 사회가 많이 어지럽습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습니다. 사회가 공동의 유익을 위해 합의하고 약속한 경계가 무너진 느낌입니다. 개인의 이익과 사회적 정의가 충돌했습니다. 전문인들이 가진 지식의 공적 가치가 무너졌습니다. 한 사회가 개인에게 부여한 권위의 경계도 무너졌습니다. 공공의 유익을 위해 세워진 권위들이 사적인 이익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각각의 지위와 역할들이 경계를 넘어 충돌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들을 마음껏 휘둘러 아픈 결과를 맞이했습니다.

건강하고 유익한 경계를 합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사회가 지키고 헌신해야 할 가치들이 바르게 서고, 그것이 최소한의 경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와 성도들 또한 사회와는 다른 경계가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선한 양심을 따라 우리 시대에 귀중한 사명을 감당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의 경계가 있습니까? 잘 지켜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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