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한국에서 설 명절은 가슴 설레며 손꼽아 기다리던 명절이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설빔으로 얻어 입은 새 옷을 입고 동네 어른들께 세배를 하기 위하여 친구들과 신나게 재잘거리며 몰려다닐 때는 마냥 즐겁기만 했다.

세배를 받으신 어른들께서는 약간의 세뱃돈을 주시거나 떡국, 강정, 떡, 밤이나 곶감 등 다과를 주시면서 공부 잘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덕담을 해주셨다. 너 나 할 것 없이 가난했던 두메산골에서 설 명절에 받은 몇십 원은 일 년 중 제일 많은 용돈 액수였다. 당시 십 원이면 학교 앞 길거리 풀빵장수 아주머니한테서 따끈따끈한 풀빵 너덧 개를 사먹을 수 있었다.

전통 명절인 설날이라는 말은 새해가 시작되는 첫날이라서 낯설다, 설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농경사회였던 옛날에 음력은 대단히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그래서 1월 1일부터 풍요를 상징하는 정월 대보름까지를 설 명절이라고 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춘절이라고 하여 3주간 축제가 이어진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7세기경부터 지켜왔고, 우리나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 신라 때부터 지켜온 것으로 본다는 이야기다.

여자들은 색동저고리나, 노랑 혹은 녹색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설빔으로 입었다. 세찬이라 불리는 설음식으로는 떡국을 빼놓을 수 없고, 식혜, 수정과, 강정류, 묽게 고은 조청을 듬뿍 찍어 먹는 각종 떡의 맛은 일품이었다. 쌀로 식혜를 만들고, 건더기를 걸러낸 식혜 물을 은은한 불로 졸여 주면 조청이 되고 더 졸여 주면 엿이 된다.

정월 보름이 넘으면 개도 절을 안 받는다 하여 정초에 부지런히 세배를 다녔다. 보름날에는 다섯 가지 이상의 잡곡으로 지은 오곡밥을 먹었다. 무말랭이, 시래기, 가지, 고사리, 깻잎, 고구마 순, 아주까리 잎, 각종 산나물 등 10여 가지의 마른 나물을 먹으면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부스럼이 생기지 말라고 밤, 잣, 호두 등 껍질이 단단한 부럼을 깨먹기도 했다.

“손이 시려워, 발이 시려워 겨울바람 때문에” 하는 차가운 삭풍이 불기 시작하는 겨울이면 방패연, 꼬리연, 가오리연 등 연을 손수 만들어 찬바람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다녔다. 연을 날릴 때에는 두 볼이 빨갛게 얼어도 추운 줄도 모르고 놀았다. 이렇게 가지고 놀던 연을 정월 대보름 날 저녁에 액운을 날려버린다고 하여 연 가까이에 작은 솜뭉치를 달고 불을 붙여 높이 날린다. 서서히 타들어가던 불이 연줄을 태우면 연줄이 끊어지고 연은 액운과 함께 멀리 날아가 버렸다.

겨울이면 팽이치기와 윷놀이를 빼놓을 수 없다. 밤나무를 잘라다가 적당한 크기로 자른 후 반을 쪼개어 다듬으면 밤나무 껍질은 짙은 갈색이고 속은 하얀 백색이어서 구분이 명확하고 좋은 윷이 된다. 또 썰매를 만들어서 개울이나 논에 얼음판이 생기면 배고픈 줄도 모르고 지쳐댔다.

정월대보름이 다가오면 깡통을 주워다가 옆과 바닥에 구멍을 숭숭 뚫어 놓고 삐삐선이라고 불리던 까만 플라스틱을 입힌 철사에 매어 쥐불 깡통을 만든다. 마른 풀과 마른 쇠똥을 주어다가 불을 붙이고 돌려대면 잠시 후에는 벌건 불덩이가 되어 돌아간다. 친구들과 정월대보름날 쥐불이요! 외치면서 뛰어다니다 보면 불꽃 조각들이 떨어져 옷에 숭숭 구멍이 나고 어머니에게 혼쭐이 나기도 했다.

쥐불을 논두렁과 밭두렁 그리고 개울가 뚝방에 놓으면 해충들의 알을 태우고 재를 가지고 기름진 땅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쥐불을 놓기도 했다. 쥐불 깡통의 불이 시들해질 때, 마른 쇠똥이나 나뭇가지를 넣고 돌려대면 다시 이글거리는 불덩이가 된다. 마지막에 돌리던 깡통을 힘껏 위로 던지면 원심력 때문에 높이 올라갔다가 불비를 쏟으며 떨어지는 모습이 독립기념일에 터뜨리는 폭죽만큼이나 화려하게 동심을 수놓았다. 때로는 잘못 던져서 낟가리나 볏짚 쌓아 놓은 곳에 떨어져 불을 내고 눈물이 쏙 빠지도록 야단을 맞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된 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설날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고 세뱃돈을 받는 풍습을 가르쳤다. 자녀들이 장성한 후에도 설날에는 온 가족이 모여서 떡국을 먹고 세배를 드린다. 금년 95세가 되시는 어머님이 정정하게 살아계셔서 세배를 드리고 용돈을 드리면 어머님은 지금도 나와 손주들에게 세뱃돈을 주신다.

설 모임이 끝난 후 이웃에 사시는 친어머님 같으신 연로하신 권사님께 세배를 드리러 갔다. 오래 전부터 우리를 끔찍이 사랑해 주시고 많은 사람들을 도우며 사시는 분이다. 누가 맛있는 음식을 갖다 드리면 자신의 입에 넣는 것보다 이웃 먹이는 것을 더 즐기신다. 이웃에 사시는 우리 누님이 어쩌다 맛있는 음식을 갖다 드리면 누님보고 빨리 가라고 쫓아내시고 이웃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신다고 속상해 하신다.

지난 주일에는 90세를 넘긴 연로하신 어른이 총각김치 한 통을 만들어 주셨다. 정성을 들여서 만든 김치가 너무 맛이 있다. 아마도 최고의 정성어린 세뱃돈을 주신 것 같다. 전통 민속놀이와 풍습이 사라져가는 이때 설날만이라도 웃어른들을 찾아 뵙고 세배를 드리고 덕담을 나누는 아름다운 미풍양속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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