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2:39

다른 평화

세상은 힘에 의해서만 평화가 가능하고 힘으로 지킬 수 있는 평화만이 진짜 평화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그것은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는 평화입니다. 공평한 분배를 통해 이루어지는 정의가 만들어내는 평화입니다. 세상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평화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은 하나님의 정의를 온전하게 실천할 수 없습니다. 독재자이건 민주적인 지도자이건 공권력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의 최후 수단은 힘입니다. 힘은 반드시 희생양을 필요로 하고 그 희생양은 언제나 힘이 없는 가난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권력으로는 성경이 말하는 온전한 평화인 '샬롬'의 세계를 구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정부와 권력이라는 세상의 필요악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목표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선거에 참여하여 차선책으로서의 선택을 바르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의무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말은 개인적인 도덕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노력하고 일해야 한다는 사회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기사에는 처음부터 그러한 의도가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누가복음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 탄생의 이야기가 서로 얽히며 시작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사촌이며 동시에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로서 예수님보다 6개월 정도 먼저 태어납니다. 태중에서도 아기들이 교감할 정도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러한 관계는 성인이 된 후에도 이어져 예수님의 수세를 세례 요한이 감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공식적으로 여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수태가 자연적인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임함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정혼한 마리아에게 생명을 위협받을 수 있는 매우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순종하였고 요셉 역시 천사의 지시대로 임신한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얼마 전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가 칙령을 내려 제국 내의 모든 사람에게 호적 등록을 하게 하였습니다.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본적지, 즉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약혼자인 마리아와 함께 가야 했습니다. 다윗의 후손들이 많았기 때문에 여관은 초만원이었습니다. 산통이 찾아온 마리아는 결국 짐승의 우리에서 아기 예수를 낳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이날 밤, 들판에서 목자들이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2:11-12), 그리고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

예수님은 이렇게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목자들은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아냈습니다. 자기들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전하였습니다. 마리아는 그들이 하는 말을 허투루 듣지 않고 마음속에 담아두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가 태어난 지 8일째가 되자, 다른 유대인 남자 아기들처럼 할례를 시키고, 성전에 희생 제물을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마리아와 요셉은 두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한 사람은 시므온이라는 노인으로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26)는 계시를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보자 기뻐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인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29-32).

그리고 마리아에게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34-35). 예수님의 행적을 아는 우리에게는 이 예언이 신기하게 들리지 않지만, 모른다는 가정 하에 들으면 이 예언은 참으로 기가 막힌 예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다른 노인은 남편과 7년을 살고 과부 된 지 84년이나 된, 100살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 선지자 안나였습니다. 그녀 역시 예수님에게 다가가 여호와께 감사를 올리고 예루살렘의 해방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아기에 대해 말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의 출생과 관련된 모든 의례를 마치고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갔습니다.

누가복음의 탄생기사에는 아기 예수를 왕으로 예언하는 동방박사들이 등장하지 않는 대신, 천사와 선지자들을 통해 예수님이 바로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가 다윗의 왕위를 이을 것임을 천사가 선언하고 이것이 "기쁨의 좋은 소식", 곧 '기쁜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시의 상황과 관련하여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의도적인 선택이며, 선언이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예수님이 탄생한 정확한 해를 알지 못하지만, 누가복음에 의하면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지배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는 기원전 63년에 태어나 기원후 14년에 죽었습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였습니다.

2세기 로마의 역사가인 수에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어머니가 남성과 접촉하지 않고 그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어머니는 아폴로 신에게 예배를 드리러 갔다가 잠이 들었는데 뱀 한 마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가 떠나갔습니다. 그녀의 몸에는 뱀 무늬의 훈적이 나타났고, 열 달 후 아우구스투스가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자궁이 별들을 향해 올라갔다가 온 땅에 펼쳐지는 꿈을 꾸었고, 그녀의 남편은 태양이 아내의 자궁에서 솟아오르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그리스 신들 가운데 최고의 신이며 태양신인 아폴로 신의 아들로 간주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태어난 해와 죽은 해 그리고 그의 부모의 신원이 확실하게 밝혀져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그의 권력이 정점에 오른 후인 1세기 초반 이전에 신격화된 이야기입니다. 아우구스투스 정권에 정통성을 더하고 그 힘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 정치적인 '프로파간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탄생 이야기가 예수님 탄생 기사와 유사하다는 사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제국의 황제였고 예수님은 변방의 사형수였습니다. 그 두 사람의 탄생 이야기가 비슷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두 사람의 유사성은 단순히 그들의 탄생이 신적이며 그래서 '신의 아들'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복음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 자체들 역시 당시 로마의 황제가 사용하던 용어들과 같았습니다. 예를 들어 '평화'도 아우구스투스에 대해 사용하던 용어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지중해 세계를 통일한 후, 평화(PAX)의 시작을 선언하였습니다. 평화는 황제의 지배로 인한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나타내는 단어였습니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황제와 로마 귀족들 그리고 로마 시민들에게는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평화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로마에 편입된 지역의 민중들과 노예들을 위한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예수와 제국』의 저자 리처드 호슬리는 '팍스 로마나'에 대한 식민지인들의 반응을 통해 그것이 군사력과 경제적 수탈로 유지되는 거짓 평화라는 것을 밝힌 바 있습니다. "로마인은 이 세상의 약탈자이다. 만일 적이 부유하면 그들은 강탈하고 만일 적이 가난하면 그들은 지배한다. 동방도 서방도 그들의 욕심을 채우지는 못했다. 그들은 약탈하고 살육하고 빼앗으며 그것을 '제국'이라 부르고, 폐허로 만들면서 그것을 '평화'라고 부른다."

당시의 비문을 분석한 고고학자들은 '복음(유앙겔리온)', 즉 '좋은 소식' 혹은 '기쁜 소식'이라는 기독교의 개념이 원래는 아우구스투스의 등장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습니다. 그리스 지역에 세워진,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쳐진 신전의 기둥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섭리가 우리의 삶을 최고선, 즉 아우구스투스로 장식하였으며 ... 또한 섭리의 자비로 인해 우리와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구원자를) 허락하시어 그가 전쟁을 그치게 하고 모든 일에 (평화로운) 질서를 세우실 것이기에, 우리의 신의 탄신일이 그로 인한 세상의 기쁜 소식의 시작을 알리게 되었다.”

비문에서 보듯이 아우구스투스의 탄생은 기쁜 소식, 즉 '복음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일대기를 기록한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 또한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1).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는 표현 자체가 로마의 황제와 지배 체제의 개념에 대한 패러디인 것입니다. 우리는 왜 복음서 기자들이 그와 같은 용어들을 사용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우구스투스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위대하고 신성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이 개념을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 적용한 것일까요?

예수님에 대한 탄생기사는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제국의 프로파간다와 관련지어야만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복음'과 '평화'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기사는 사건에 대한 단순한 묘사가 아닙니다. 의도적인 재구성을 통해 거짓을 고발하면서 예수님의 탄생만이 참된 평화가 가능한 진짜 복음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가짜 평화의 시대가 끝나고 참된 평화의 시대를 가져올 진짜 왕이 태어나신 것입니다.

비천한 사람들을 높여줄 평화의 왕

예수님의 탄생 기사에 포함되어 있는 '마리아의 찬가'는 아기 예수의 탄생이 함의하고 있는 내용을 종합적으로 보여 줍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1:47-55).

이 찬가 속에서 여호와께서 예수님의 아버지시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너무나 분명해서 기독교 국가의 많은 독재자들이 마리아의 찬가에 곡을 붙인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권세 있는 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리에서 쫓겨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부자들에게는 좋은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빈털터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천한 자들, 주리는 자들에게 복음은 명실 공히 복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이 복음 되는 이유입니다. 비천한 자들과 주리는 자들이 곤고한 자리에서 해방되면 세상은 모두가 공평하게 잘 살 수 있는 평화의 나라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비천한 사람들을 높여줄 평화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로마의 평화, 세상의 평화와는 차원이 다른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어 모든 이가 고르게 잘 살 수 있는 참된 평화입니다. 쫓겨난 권세자들과 빈털터리가 된 부자들도 그곳에 이르면 자신들의 불행이 자신들을 포함한 모두의 행복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명실상부한 온 세상의 복음이 되는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다.

로마제국에서는 다른 사람을 "주님"이라고 부르거나. 심지어 "우리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호칭의 사용은 매우 일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유일한 주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반역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믿고 선포하는 것은 그분의 평화가 진짜 평화이며 카이사르의 평화가 거짓임을 드러내는 것이며 동시에 예수님의 평화를 위해 살아가겠다는 결단이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카이사르는 폭력적인 승리를 통해 평화를 구현하며, 그리스도는 비폭력적인 정의를 통해 평화를 구현합니다. 로마는 물론 역사 속의 모든 제국들은 이 세상의 질서가 잡힐 때 지상에 평화가 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이 공평하고 정의로울 때 지상에 평화가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정치적인 평화이기보다 종교적인 평화라고 주장할 수 없으며, 외부적인 평화라기보다 내면적인 평화라고 주장할 수 없으며, 지상의 평화라기보다 천상의 평화라고 주장할 수 없으며, 현재의 평화라기보다는 미래의 평화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종교적인 동시에 정치적이며, 내면적인 동시에 외부적이며, 지상의 평화인 동시에 천상의 평화이며, 현재의 평화인 동시에 미래의 평화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카이사르의 평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