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 이론에 의하면 소통이 잘 이루어지려면 말하기보다 듣기를 잘해야 합니다. 듣기에는 5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무시하기, 듣는 체하기, 선택적으로 듣기, 주의깊게 듣기, 공감하며 듣기입니다.

지난 해(2016년) 옥스퍼드 사전은 올해의 단어로 ‘포스트 트루스(post-truth, 탈진실)’를 선정했지요. 형용사로 분류된 이 단어는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이나 개인적 신념이 여론 형성에 더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사람들이 선택적으로 듣고 선택적으로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선택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를테면 사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판단하는 과정 속에서, 정보나 사실 자체가 아니라 이미 자기 속에 형성되어 있는 가치관이나 선호하는 감정이 수용 여부의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이면 수긍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부정하거나 또는 왜곡하여 해석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실성은 중요하지 않게 되고, 그 정보가 내게 유리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중요해집니다. 결국 실체적 진실,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해석이 중시되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보이는 것을 다 믿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관찰력과 전달력은 불완전합니다. 때문에 합리적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생각은 버리고 어떤 생각은 취하는 선택이 이루어집니다. 더구나 입력된 정보에 대한 선택권을 그 자신이 갖는 것은 개인 주권이라는 관점에서 뭐라 할 수 없습니다. 해석은 자유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해석은 중요한 의사 전달 과정의 단계입니다.

문제는 이 해석의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 바른 해석을 위해 사실을 확인하고 합리적인 믿음이 생길 때까지 검증하고 실험해 보는 노력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빠서이기도 하고 능력이 없어서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너무 많거나 상반된 정보를 접하다보면 지식이 오히려 불확실성을 높이고 불안심리도 덩달아 높게 만듭니다. 그러다보니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인간의 선택은 여러가지 분석을 통한 종합적인 판단이 아니라 한두 가지를 기초로 한 단편적인 판단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판단의 오류가 발생하는 순간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이 직접 관찰하고 분석하여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해놓은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옳고 그름이나 사실의 여부가 아니라 사실이라고 믿는 마음 또는 믿고 싶은 마음이 더 많이 작용한다는 점입니다. 믿을 게 없는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어떤 것이라도 믿기로 했고,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믿음 그 자체로 불안을 이겨내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어렵게 믿고 나면 그 믿음을 바꾸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같아집니다. 때문에 그때부터는 믿음의 온전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는 싸움을 합니다. 때문에 남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결국 인지부조화의 단계에 빠져들고 독선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분명한 것은 거짓은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 있고, 거짓에 매여 사는 사람의 끝은 허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리라면 진리에 대해 의심해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것이 정말 진리라면 우리는 다시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의심의 과정을 거쳐 다시 분석해 보면 거짓임이 드러나지만, 진실은 의심의 과정을 거쳐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명백해지는 법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은 어떤 사건과 사실을 해석할 때 관찰과 분석, 그리고 표현과 전달에 있어서 최대한 객관성, 합리성 그리고 일관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가짜 뉴스와 더불어 가짜  복음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가짜 뉴스를 생산해내는 이는 물론이고 무분별하게 이를 유통하는 이들 역시 진리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생산자가 되지 못한다면, 성실한 진리의 발견자라도 되어야 하고 그마저 능력이 없어 못한다면, 진리의 올바른 유통자라도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뉴스든 복음이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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