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 on Spirituality 61

십계명을 묵상하는 연속글에서 오늘은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을 함께 묵상합니다. 첫 번째 계명을 묵상하기 전에 먼저 십계명이 시작되는 서론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출애굽의 구원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출애굽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분임을 기억하면 십계명에 응답하는 삶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무모한 은혜”(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의 표현)를 베풀어 주시고, 이 은혜에 감격하는 응답으로 주어진 것이 십계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를 먼저 하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사랑을 먼저 베푸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 구원의 은혜에 감격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응답하며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십계명은 단순히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명령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곧 우리를 위해서 주어진 축복이기도 합니다. 십계명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첫 번째 계명이 이 진정한 자유의 근원에 대해서 알려 줍니다.

너의 하나님은 무엇이냐?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이 첫 번째 계명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먼저 우리에게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하나님으로 붙잡고 살아갑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종교란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궁극적으로 관심하는 것, 그것이 나의 삶의 중심에 자리하고 삶의 방향을 이끌어가는 것, 이것이 나에게는 종교이고, 하나님입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궁극적인 관심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돈이 궁극적 관심이고, 어떤 분에게는 성공과 명예가 궁극적 관심이고, 어떤 분에게는 철학이나 이데올로기가 삶을 이끌어가는 관심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폴 틸리히는 이 세상에 무신론자는 없다고 말합니다. 저마다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는 하나님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번 십계명 묵상에서 폴란드의 천재 영화감독으로 불리는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10부작 연작영화 <데칼로그>를 자주 소개할 생각입니다. 이 감독은 세 가지 색 연작영화, <블루>, <레드>, <화이트>로 유명한 감독입니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만든 영화 <데칼로그>는 십계명의 한 계명을 하나의 단편 영화로 만들어낸 10부작 영화입니다. 1987년에 제작된 이 영화를 <타임>지는 1980년대의 최고 영화로 선정했고,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데칼로그>를 자신의 일생에서 걸작(masterpiece)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영화라고 극찬하였습니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을 다룬 영화에서 컴퓨터 언어학 교수인 아버지와 열 살 쯤 되어보이는 아들 파웰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교수인 아버지는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어렸을 적에는 누나와 함께 교회에 다녔지만, 어느덧 신앙의 진리들이 그에게는 시큰둥하게 여겨졌고, 결국은 과학적인 사고로 이해하기 어려운 기독교를 떠나 무신론자가 됩니다. 하지만 그는 어느덧 과학과 이성을 그의 하나님으로 삼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 어린 아들에게 스케이트를 선물하였는데, 아들이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연못이 안전하게 얼었는지를 이 아버지가 컴퓨터를 이용해서 과학적으로 계산합니다. 하지만 비극이 일어납니다. 아들 파웰이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그만 얼음이 깨져 목숨을 잃게 됩니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이 비극적인 이야기를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을 보여주는 영화로 선택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붙잡고 있는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돌아보도록 초대하기 위함입니다. 영화 속에서 과학과 이성을 신봉하는 교수인 아버지는 모든 것이 컴퓨터의 계산으로 설명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는 자신이 믿었던 과학과 이성을 어느덧 하나님의 자리에 놓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자리에 대신 놓았던 다른 하나님이 얼마나 그를 당혹하게 만들었는지를 이 영화는 보여 줍니다. 다른 하나님을 붙잡고 살아가다가 맛보는 낭패감, 이것이 이 영화가 보여 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대신해서 붙잡고 살아가는 다른 하나님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성경은 이것을 우상이라고 부릅니다. 돈이라는 우상, 권력이라는 우상, 명예 혹은 철학이라는 우상, 심지어 나만 믿는 우상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이 우상들은 얼마나 우리에게 낭패감을 맛보게 할까요? 어느 순간 이 우상들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삶의 무의미와 낭패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내가 이 우상을 하나님으로 알고 살아왔다니…!’ 하나님은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에서 가짜 하나님을 벗어버리고, 진짜 하나님을 붙잡으라고 초대합니다.

진짜 하나님을 앞에 두라

그런 의미에서 첫 번째 계명의 본질적인 의미는 “가짜 하나님을 벗어버리고, 진짜 하나님을 네 앞에 두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집착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히려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가짜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낭패감을 벗어나서, 진짜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기쁨과 평안을 경험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중세의 영성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에게서 하나님을 없애 주십시오.” 이 기도는 정확히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을 기도로 바꾼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짜 하나님을 벗어버리고, 살아계신 진짜 하나님을 모시게 해달라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일본의 어느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는데, 예배 중에 남성중창단의 특별찬양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찬양을 하러 나온 세 명의 남자들의 비주얼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어깨가 딱 벌어지고, 목과 팔에 있는 문신에는 맹수들이 뛰어노는 압도적인 비주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전직 야쿠자들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외모에 놀라고, 찬양이 시작되자 더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험한 체격으로 찬양하는 목소리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눈을 감으면 은혜가 되고, 눈을 뜨면 시험에 드는 묘한 특송의 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찬양을 마치고 그 중의 한 사람이 짧은 간증을 했습니다. 자기들은 모두 새끼손가락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야쿠자를 나오려고 하니까, 두목이 탁자에 칼을 탁 꽂더랍니다. 그 칼로 자신들의 새끼 손가락을 자르고서야 조직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간증을 듣고서 설교를 갔던 목사님이 오히려 큰 은혜를 받고는 자신의 교회에 돌아와서 교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 무엇을 잘라내었습니까?”(유기성,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에서)

이 마지막 질문이 오늘 우리가 응답해야 할 질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앞에 두기 위해서 어떤 우상을 잘라내고 있습니까? 에크하르트처럼 “하나님, 저에게서 하나님을 없애 주십시오” 라고 기도해야 하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가짜 하나님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에서 우상을 벗어버릴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가짜 하나님을 버리고 진짜 하나님을 붙들 때, 삶의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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