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7)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 사건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던 백성의 기대를 단번에 허물어 버린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하지만 포로시대를 지나면서 역사 속에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약적인 관념에 대한 기대가 어두워질수록 미래에 대한 희망의 빛을 발하게 되었다.                               

바벨론 유수는 소수민족에게는 총체적인 재난이었고, 유대인의 삶에 미친 결과는 매우 큰 것이었다. 그 땅은 초토화되었고, 예루살렘을 포함하여 모든 성읍이 바벨론 군대에 의하여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수천 명의 백성들이 도망을 갔거나 전투에서 죽었으며 수천 명의 지도자급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강제로 끌려가게 되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빈천한 농부들로서 곡식을 수확하기 위해 남겨졌다(왕하 25:12). 국가의 지원을 받고 국가와 사회복지를 장려하기 위해 존재하는 국가 교회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언약적 유대관계는 깨어졌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운명은 끝장났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바벨론 유수는 이스라엘의 영적 소멸이 아니었으며 생명력이 있었다. 그 안에 남은 자가 있었다. 선지자들은 다가올 일에 순응하는 길을 예비하였으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공평한 분이라고 꾸준히 역설하였다. 심판은 하나님의 말씀에 역행한 결과이므로, 정당한 역사라고 주장하였으며, 희생 제사와 성전 의식이 예배의 중심이 아닐 뿐더러 예배의 본질적 부분이 아니며 예배의 본질은 순종과 정직에 있다고 역설하였다(렘 7:21-23).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국가적 제사의식을 보유한 국가로부터 유대교의 율법 공동체로 변천되었다.                            

 

역사의 멸망을 이야기하는 이사야 1장~39장의 전반부에 이어서 40장~66 장에서 발견되는 회복에 대한 말씀에는  첫째로 비약적 소망이 담겨 있다 굴욕의 밤은 그치고 기쁜 소식이 있으며 영광스러운 미래가 열려 있다고 말한다. 둘째로 오직 하나님 만이 역사의 주님이시라는 이 불변의 신앙에 비추어볼 때 모든 예언은 다음과 같이 진지한 기대로 충만해진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위한 미래를 갖고 계신다. 과거의 위대한 일들을 완전히 압도할 정도로 엄청난 새 일(New Thing)이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일에 이스라엘은 그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의 영광과 목적을 위하여 참여하는 것이다. 옛 출애굽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새로운 출애굽은 바벨론에서의  속박을 벗어나는 것으로, 새로 생겨난 이스라엘과 맺는 새 언약을 말하는 것이다. 가시적인 이스라엘 국가와 동일시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 안에서도 그에게 복종하는 그의 종들만이 인정되고(사 65 :13), 동시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기꺼운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땅의 모든 국가의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사야서의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은 구약성경의 도처에서 등장하지만, 소위 ‘고난의 종의 시편’에서 특별히 명확한 글을 발견하게 되는데, 고난의 종은 자신이 어떤 목적을 위해 오래 전에 택함을 받았으며 때가 찰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고 선언한다. 그는 분명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도구이자 이스라엘의 영광이었다(사  49:3). 이 고난의 종의 개념은 구약의 희생제사를 생각하게 하며, 하나님 나라의 승리는 고난의 종(예수님)의 대리적 희생을 통해서 성취된다. 그러나 유대교는 고난의 종을 메시아로 볼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고난받는 메시아를 원하지 않았다. 후기 문헌 곳곳에 ‘낮아지고 고난 받는 메시아’가 희미하게 나타나지만(슥 9:9, 12:10 등), 메시아가 다시 생명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소명은 그들에게는 걸림돌이였다. 하지만 새 언약에 의해 세워진 교회의 의무는 고난의 종의 임무와 다를 것이 없고 다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한다, 이는 ‘우리가 무익한 종이오니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죄에 대한 고백을 전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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