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마태복음 13:47-50).

인습적 지혜

인습적인 지혜는 우리가 그 안에서 헤엄치며 살아가는 문화라는 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숨쉬는 '상식'이라는 공기입니다. 인습적 지혜는 모두가 참되다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인습적 지혜는 토라와 잠언의 민중 지혜였습니다. 그 지혜는 실용적이며 보상과 처벌의 체계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즉 열심히 일하고 의롭게 살면 부자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며, 착한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를 뒤집으면, 게으르고 부도덕하게 살면 부자가 될 수 없으며, 나쁜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알아야 하며 그 안에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배를 당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인습적 지혜가 맞아 떨어질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목구멍에 풀칠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로마나 헤롯에게 잘 보여 이익을 보장받았는데 그 일은 그들의 인습적 지혜에 의하면 부도덕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황을 반전시킬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렸고 자연스럽게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기적을 행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예수님에게 기대를 가지고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인습적 지혜와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왔다가 멀어졌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상황이 답답하기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천국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인습적 지혜를 깨뜨리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종의 충격 요법으로 사용하신 도구가 바로 비유입니다.

최초의 복음인 마가복음에는 비유들만 나오는 장이 있으며, 또한 예수님께서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4:34)는 문장이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유들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때로는 화를 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그들의 인습적 지혜를 타파하고 새로운 대안 지혜인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조립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필요합니다. 공기와 같은 상식이 우리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습니다. 심지어 금과옥조로 여기는 기독교 교리들 역시 인습적 지혜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아듣기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예수님의 비유 속으로 들어가 인습적 지혜를 타파하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아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인지 부조화

인습적 지혜와 함께 생각해야 할 또 한 가지는 인지 부조화입니다. 인지 부조화라는 용어는 레온 페스팅거가 만들어낸 용어로, 보통 사람들이 생각 없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습관 등이 새로운 개념과 충돌하여 부조화를 만들어낼 경우의 정신 상태를 묘사하는 용어입니다. 예를 들어 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흡연을 한다면, 흡연을 포기하거나 흡연이 건강에 해롭다는 생각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건강과 흡연이 반대되는 개념이므로, 둘 중 하나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인지 부조화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영적인 경우에는 인지 부조화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으로서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미워하고 복수하고 있는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사람들 안에 있는 이러한 인지 부조화를 목격하게 함으로써 모순된 자신의 모습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인 대안 지혜를 따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인지 부조화를 깨달으면, 고민하거나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기보다 분노와 자기합리화를 통해 계속해서 인지 부조화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겸손이야말로 배움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라는 사실입니다.

종말론적 비유

그물의 비유(마태복음 13:47-50)는 예수님께서 사셨던 당시를 배경으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다른 비유들과 맥을 같이 하지만, 그물의 비유는 출발점보다는 그 이후를 부각시킵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물에 비유되었는데, 이 그물은 이미 바다에 던져진 그물입니다. 따라서 그물의 비유는 예수님의 시대보다는 그때를 포함하여 모든 시대를 반영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비유의 핵심도 모든 시대에 걸쳐 그물로 각종 고기를 모으는 과정이 아니라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를 분리하는 마지막 장면에 있습니다. 그물의 비유는 가라지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종말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고로 그물의 비유를 종말에 관한 비유, 즉 종말론적 비유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물 비유

예수님은 사역 초기에 주로 갈릴리 바닷가에서 활동하셨으므로 고기 잡는 이야기는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갈릴리 바다와 고기 잡는 배들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어부 출신도 몇 명 있었으므로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바다가 삶의 터전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당시 고기잡이는 생업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사시사철 먹을 것을 구할 수 있고 필요한 만큼 잡을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고기잡이는 농사보다 오히려 더 매력적인 직종으로 여겨졌습니다. 당시 어부들은 조그만 나룻배를 가지고 있었고 두 종류의 그물을 사용했습니다. 투망과 후릿그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에 사용하신 그물은 저인망과 비슷한 후릿그물인 것으로 보입니다.

후릿그물은 양쪽 끝을 배 두 척에 각각 묶어서 바다에 내린 다음 고기들을 몰아 잡는 그물입니다. "바다에 치고 물고기를 모는" 이라는 표현만이 아니라 "물가로 끌어내고"라는 설명에 꼭 들어맞습니다. 어부들이 바다에 내린 그물만큼 두 척을 넓게 벌리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같은 방향으로 배를 몰면 그물이 지나가는 곳에 있는 고기들은 모두 그물에 들어옵니다. 좋은 고기와 못된 고기의 분리는 해변에서 이루어집니다. 어부들은 좋은 것을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을 내버립니다.

비유를 설명하기 위해 어부들을 등장시켰지만 본문에는 어부들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비유어는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입니다. 그물은 그물인데 바다에 쳐진 그물이며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비유어로 그물과 바다, 그물과 물고기들이라는 복합개념을 사용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의미는 그물과 '바다에 치고', 그물과 '물고기를 모는'의 결합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물이 바다에 쳐진 것은 농부가 좋은 씨를 뿌렸다거나 누룩을 밀가루에 넣었다는 것과 비슷하게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전파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을 불러 모으시는 광경을 연상시킵니다. 이 그물의 비유에도 예수님의 출현과 활동에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더 큰 그림

그물 비유의 독특한 점은 다른 비유들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부각된 데 반해, 결과를 더 부각시킨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쳐진 그물로 비유됩니다.

다른 차이점은 하나님 나라가 세상 속에서 별개의 집단으로 등장하여 사람들을 모으는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이때까지 다룬 비유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주로 개인과의 관련성 속에서만 다루어지고 명백한 집단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습니다. 좋은 땅, 곡식, 보화를 발견한 사람, 진주를 찾는 상인은 개인에 관한 비유였습니다. 겨자씨, 누룩, 비밀리에 자라는 씨는 하나님 나라의 전체성과 관련된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개인에 대한 언급은 아닙니다. 그물 비유에는 확연하지는 않지만 개인과 집단과 세상의 관계가 등장합니다. 신자와 교회와 세상의 관계와 비슷한 도식이 이 비유에 들어 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땅은 이 세상을 뜻합니다. 그러나 해설부에서는 가라지로 비유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들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쫓겨나는 곳은 세상이 아니라 '인자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물 비유에서는 버려질 물고기들도 비유된 그물에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물이 쳐진 바다를 세상, 그물을 하나님 나라, 못된 물고기를 하나님 나라와 관계하는 부정적 부분이라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곡식과 가라지 비유에선 이러한 여지를 만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해설부를 따라서 곡식과 가라지가 인자의 나라 즉 하나님 나라에 섞여 있는 것으로 해석하면 그물 비유와 비슷해지지만 세상이라고 부를 만한 무엇이 없고, 비유를 따라서 곡식과 가라지가 세상에 섞여 있는 것으로 해석하면 세상과 별도로 취급해야 하는 하나님 나라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를 그림 전체로 보지 않고 전체 그림의 부분을 강조하고 설명하는 비유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즉 비유부는 종말까지 하나님 나라의 자녀와 악한 자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공존하는 상황을 강조하고 해설부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구분되는 상황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그물의 비유에서는 그보다 더 큰 그림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바다에 내리쳐진 그물처럼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물이 모든 종류의 고기를 몰아 모으듯 하나님 나라는 인종과 종족,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사람들을 어떻게 모으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앞의 비유들을 참고하면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된다는 것의 다른 비유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물 비유를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번 드리워진 그물은 사라지지 않고 대대로 곳곳에서 차별 없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곧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을 모읍니다. 이 과정은 그물에 고기가 가득해지기까지 계속됩니다.

이 그물 비유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의 대상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독특한 영적 성격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사역은 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제한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수천만 명이 지구상에 존재했으나 그분을 보고 그분의 설교를 듣고 그분의 제자가 된 사람들, 곧 예수님이 알려 주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은 사람들은 극소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과 교회에 실려 역사의 수레를 타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지중해 연안의 전 지역 그리고 땅 끝을 향하여 성장하고 있지만, 지구라는 넓은 바다에는 하나님 나라의 그물이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는 물고기들이 무리지어 헤엄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없어도, 예수님을 몰라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세상에 던져진 그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온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고 사랑하여 기필코 손에 넣으려고 비싼 값을 치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발견한 사람에게나 보물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언제까지나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밀을 공개하셨습니다. 비밀이라고 부르신 것은 언젠가 모두 알게 될 것이란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없다는 사람들의 생각이 착각이요 당신이 알리는 것이 진리임을 비밀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땅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에 접촉했다는 사실은 행운이요 복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연이라도 하나님 나라의 그물에 부딪힌다는 것은 퍽 드문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 자체가 사적 언어요 세상에 맞지 않는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라는 그물 안에서 우리는 오히려 바깥 세계를 이상하다고 느끼며 우리만의 문화와 역사를 정리하지만, 인류 전체 그리고 우주 전체에 비할 때 여전히 그물 안은 생소하고 이상한 세계입니다. 우리는 어쩌다가 하나님 나라라는 그물에 걸려든 복 받은 물고기들입니다. 조직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의하여 이 시대에 한국 땅에 보내져 복음을 접하고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 나라라는 그물 속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물 비유는 예수님과 그분을 믿는 사람들을 한 묶음으로 취급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합니다. 또 물고기로 가득 채워지기까지 그물이 쳐져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온갖 종류의 물고기들이 모여들어 하나님 나라는 점점 성장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발전과 성장에는 기한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점을 "각종 물고기가 그물에 가득 하매"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곧 다른 상황을 그리셨습니다.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49). 이 새로운 상황은 마지막 심판을 연상하도록 도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을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49-50)라고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의인과 악인의 분리에 있습니다.

경고장

그물 비유에서 하나님의 심판 대상은 하나님 나라로 비유된 그물, 이 그물과 관련된 물고기들입니다. 좋은 집단으로 간주해야 할 하나님 나라 안에서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고 심판하는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물 밖의 고기들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바다에 널려 있는 물고기들을 그물 안의 물고기들과 구별하며 이들을 세상에 속한 사람들로 규정하고 하나님의 최후 심판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과 세상에 속한 사람에게 각기 다른 영원한 상태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두루 퍼져 있는 최후 심판의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물 비유가 교훈하는 바는 아닙니다. 그물 비유에 표현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 일어날 사건입니다. 좋은 물고기들을 골라 그릇에 담고 못된 물고기를 밖에 버리는 것은 의인들 가운데서 악인을 고르는 심판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 모습을 드러낸 하나님 나라에도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가 혼합되어 있어야만 가능한 심판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이 교회라고 한다면 이 혼합 상태를 이해하기 훨씬 쉬워집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는 절대적으로 긍정적 개념이기에 악인이나 불법을 행한 사람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믿음 없는 사람들도 공공연히 섞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개념을 덜 긍정적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교회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자체를 위협합니다. 이것이 그물 비유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개념은 우리 시대에 고착되어 있는 완전 긍정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라는 그물에 들어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심판을 면제 받거나 무사히 통과하여 영원히 복된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안에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가 함께 있습니다. 곡식이 있고 가라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의로운 사람들과 남을 해하고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의인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약속되는 반면, 악인에게는 그가 비록 하나님 나라 안에 있어도 영벌과 저주가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는 이 부정적 부분이 무엇일까요? 가라지의 비유는 이들을 마귀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통해 구분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물의 비유는 못된 물고기가 함께 있고 마지막 운명이 달라진다고 말할 뿐, 어떤 물고기가 못된 물고기인가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 시절부터 신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 곧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만이 아시고 현세의 교회로서의 하나님 나라는 필연적으로 신자와 불신자가 섞여 있는 불완전한 형태라거나. 교회에는 의인을 위한 필요악으로 악인이 함께 존재한다거나, 하나님 나라의 복을 넘보고 이리가 양의 가죽을 쓰고 섞여 있다거나, 악인들 자신도 의인인 줄 착각하고 있다는 등의 주석입니다.

그러나 그물의 비유는 이런 설명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누가 좋은 물고기인지 못된 물고기인지를 판정하는 것은 이 그물 비유가 의도하는 바가 아닙니다. 다만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신 것을 통해서 그 판별 기준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 주시려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임을 고려하면, 이 그물 비유는 제자들에게 심각한 경고장이 됩니다. 예수님을 무작정 따라다닌다고 만사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제자라고 모든 문제가 다 풀리지 않습니다. 열두 사도 중에도 가롯 유다가 있었습니다. 악인과 의인이 공존하는 현세적 하나님 나라는 그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영생으로 들어가는 입장권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물 안 고기들일수록 더 심각하게 고민하고 경성해야 할 것입니다. 이 비유는 영원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고맙고도 아름다운 비유입니다.

넘어지게 하는 자와 모든 불법을 행하는 자 vs 열매 맺는 자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고한 후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3:10-12)는 말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끝까지 경성해야 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간디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고 기독교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간디를 넘어지게 한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습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 말 하나가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마지막 날 풀무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일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서 선한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나에게 좋은 열매가 있는지 자신을 늘 돌아보며 어제 하지 못했거나 망설이던 일을 오늘은 할 수 있는 용기를 주님께 구해야 할 것입니다.

인습적 지혜를 타파하고, 인지 부조화를 불식하고, 예수님의 비유에 담긴 의미를 깨달아, 사도 바울처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빌 3:13-14)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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