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25:1-13).

배경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개의 천국 비유가 나란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이해하려면 배경 연구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지 나흘 정도가 지났습니다. 그동안 예수님과 예루살렘 지도자들 사이의 골은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지금까지 의견이 일치된 적 없었던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연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예언하신 마지막을 차곡차곡 준비하셨습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걸맞게 제자들도 재림과 종말에 관하여 질문했습니다. 감람산 위에 앉아서  예수님께서는 말세에 일어날 일들을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설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종말 설교라고 불리는 이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이나 재림의 시간, 사건들의 구체적인 진행 과정을 알려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그 날이 오기 전에 어떤 징조들이 나타날 것인가를 주요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설교는 전체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집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즈음하여 제자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이며, 그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고 무엇을 주의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치셨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

기록에 의하면 서기 1세기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남자는 18-24세, 여자는 13-14세가 결혼 적령기였습니다. 당시의 결혼은 한 남자와 미래의 장인이 약속을 맺음으로써 성립되었습니다. 약속한 날짜가 되면 신랑이 먼저 신부 집을 찾아갑니다. 친구들과 함께 있던 신부는 신랑을 따라 친구들이 둘러싼 가운데 신랑 집으로 가서 혼인잔치를 벌입니다. 결혼식은 대개 초저녁에 시작됩니다. 따라서 신부의 행렬은 신부의 친구들이 등불을 밝히고 춤을 추며 가는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예수님의 열 처녀 비유는 이러한 결혼 풍습에서 한 장면을 따온 것입니다.

열 명의 처녀들이 들러리를 서려고 시집 가는 친구 집에 모였습니다. 재잘거리며 마치 자기들이 시집가는 것인 양 흥분했습니다. 그들은 행사에 사용할 등불을 준비해서 가지고 갔습니다. 신랑은 초저녁에 오기 때문에 여분의 기름은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섯 처녀는 행여나 하는 마음에 여분의 기름을 가지고 갔습니다.

하지만 신랑은 제때에 오지 않았습니다. 처녀들은 꾸벅꾸벅 졸다가 잠들었습니다. 신랑은 밤중에야 도착했습니다. 신랑이 왔다고 외치는 고함 소리에 신부 집은 갑자기 시끄러워졌습니다. 열 처녀도 일어나 머리를 손질하고 등을 손에 쥐었습니다. 등불은 그들이 자고 있는 동안에도 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게는 예비한 기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별 걱정이 없었습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가 기름을 나누어 쓰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비해온 기름은 나누어 쓸 정도로 많지 않았습니다. 예비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은 가게에 가서 사라고 말합니다. 다급해진 다섯 처녀들은 기름을 사려고 황급히 달려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결혼 행렬은 시작되었고 잔칫집의 문은 굳게 닫혔습니다.

해석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접촉점을 열 처녀에게 맞추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개념의 세 요소 중 백성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비유입니다. 신랑은 예수님 당신의 비유어입니다. 신랑을 기다린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 이 비유의 끝에 하신 말씀, 즉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13)는 종말설교 중 첫 번째 결론인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24:42)와 같습니다. 이 구절의 '주님의 재림'은 마태복음 24장 3절에서 제자들이 질문한 '주의 임하심', 즉 재림을 가리킵니다. 이 열 처녀의 비유가 예수님의 재림에 즈음한 제자들의 태도를 교훈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이나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천국의 비유가 시작될 때부터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예수님과 관계없는 사람은 모두,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이라던 이스라엘까지도 하나님 나라에서 배제되었습니다. 비유 속의 열 처녀는 모두 신랑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상징어로 보아야 합니다.

열 처녀는 모두 신랑을 기다렸습니다.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의 다른 점이 있다면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느냐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신랑이 늦지만 않았다면 아무 일 없었을 것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혼인잔치는 미래에 대한 예언입니다.

주제는 "준비하고 깨어 있어라"(마 24:44, 25:13)입니다.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지혜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을 구분하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열 처녀 비유의 핵심은 여분의 기름이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있습니다. 그것이 없어서 어리석은 처녀들의 등잔은 빛을 잃었고 이 처녀들은 잔치에 가나 마나가 된 것입니다. 문제를 이렇게 꼬이게 한 것은 재림의 지연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도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이 비유의 배경이 되는 종말 설교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있기 전에 세상을 미혹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난리가 일어나고 소문들이 떠돌고 민족적, 국가적 전쟁이 발생하며, 곳곳에 지진과 기근이 발생합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환난을 당합니다.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에 빠지고 서로 미워하고 사랑을 버립니다. 이렇게 불법이 판을 치고 난 이후에야 인자가 오십니다.

열 처녀 비유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시든 끝까지 인내하고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것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요 격려입니다. 여분의 기름은 제자들이 겪게 될 미래의 일들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분을 믿음으로써 제자가 되었습니다. '믿음'은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만드는 도구입니다. 믿는 사람=제자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제자라는 단어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예비 기름

그렇다면 제자들을 제자로 존속하게 하는 예비 기름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통해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을 분석하면 대략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에 대한 선언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인격, 활동, 생애와 연결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라는 권고, 회개나 믿음 등 첫째 요소에 대한 긍정적 반응을 뜻합니다.

셋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이는 구약의 해석과 예수님의 종교적, 윤리적 명령을 뜻합니다.

넷째, 예수님의 가르침을 꼭 가르치고 이행하라는 권고와 경고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을 바르게 수용했다는 확증이 됩니다.

여기서 첫째와 셋째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방적인 사역입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직설법과 명령법으로 구분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것과 명령하신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둘째와 넷째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역인 첫째와 셋째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응답을 세분하면 둘째는 인간의 수동적 반응, 넷째는 인간의 능동적 반응을 의미합니다. 전체적으로 풀이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순종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인격과 삶을 다루셨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을 불러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만드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인격, 삶과 관련된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시면서 동시에 은혜에 어울리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삶의 차원에서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믿고 의지하는 것과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로 결합됩니다.

등과 기름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우리는 환란과 미혹, 핍박 속에서도 믿음과 순종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삶입니다. 따라서 기다림의 시대에 특정한 장소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비 기름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일관된 가르침

예수님의 모든 비유와 말씀 속에는 일관된 가르침이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16).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5-14).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받아들이고 지켜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에 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유도 같은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립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믿음을 통해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그분이 가르치신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고백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변화와 삶의 변화를 읽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당신을 의지하고 당신의 말씀에 마음을 쏟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순결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가리켜 '슬기로운 처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가르침에 순종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음욕을 품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와 금식과 같은 영적인 훈련에 참여할 때, 자기의가 되지 않도록 신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염려하지 말고 주님을 신뢰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위선적인 삶을 뿌리 뽑으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당신처럼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선한 은사를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일이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욕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유는 하나님의 기준에 맞게 살지 못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또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심으로 이제 우리도 그분처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고 순종하는 삶을 예배로 드리고,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림으로써 그분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미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베풀어 주신 은혜와 용서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그분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다면, 그분의 사랑으로 구원 받았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으로 주님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분이 아무리 늦게 오셔도 우리의 등불은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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