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배우는 가정과 기대의 문제

인간과 천지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다룬 성경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잘못된 가정(假定)과 집착으로 인한 사건사고는 창세기부터 끊임없이 이어진다. 사람의 아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을 더 기쁘게 받으셨으니까 자신의 위치는 더욱 더 작아질 거라는 선망과 질투와 섣부른 가정의 합작품이었다. 우리들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가정 (假定)’이 유난히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레 겁먹고 자신의 목숨 유지를 위해 아내를 두 번씩이나 이방의 왕에게 넘겨 주지 않았던가? 아내를 넘겨 주지 않았다면 본인이 과연 죽었을까? 여자관계도 마찬가지다. 두 여자 사이에서 아브라함은 오락가락하는 소심함을 보여 준다. 아내 사라 역시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의 자리를 넘볼까 봐 아브라함에게 일러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쫓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쫓지 않았다면 과연 그 둘은 아내라는 자리를 놓고 끝까지 싸웠을까?

요셉의 형제들은 그를 왜 팔아 넘겼을까? 어린 요셉의 꿈 이야기가 그렇게 그들을 괴롭혔을까?(창37:5-9)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꿈 이야기를 왜 꿈으로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일까? 출애굽의 영웅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만 사용될 수 있는 거룩한 지팡이를 백성들의 말만 듣고 잘못 사용해, 본인은 물론 모든 출애굽 1세대들이 가나안의 목전에서 죽게 만들었고, 사사기의 첫 번째 여자 영웅인 드보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도망중인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같은 편이라고 ‘가정’했던 헤벨의 아내에게 관자놀이에 말뚝 박혀 죽는다.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첫째 왕으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기까지 한 사울은 어리고 충성된 다윗을 왜 그렇게 죽이려고 했을까? 다윗을 향한 이스라엘 여인들의 노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가 그렇게 자극적이고 전복적이었던가? 뛰어난 부하에 대한 백성들의 치하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 결국 사울은 다윗이 대권까지 넘볼 것이라 가정하고, 나쁜 마음을 품게 되며, 하나님이 부리는 악령까지 들어(삼상 18:10) 다윗을 죽이려는 집착은 도를 넘게 된다. 그런 다윗은 영적으로 자유로운 자였나? 사울을 동굴에서 직면했을 때나 처절한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는 그의 정신이 깨어서(sane) 영적으로 자유했고 그래서 죄를 짓지 않았으나, 왕이 된 후에는 다윗 역시 가정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어느 날 부하의 아내를 사랑하게 되고 충직한 우리야를 죽이기 위한 음모까지 꾸미게 된다.

신약시대에는 또 어떤가? 성격 급하기로는 사도 요한도 베드로 못지 않았다. 요한복음과 다른 요한서의 주제와 같이 사랑의 사도로 이름나 있는 그였지만, 알고 보면 예수님이‘우뢰의 아들’이라고 부를 만큼 그는 성격이 급하고 혈기가 왕성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자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태워 죽이자고 말하지 않았던가?(눅 9:54) 어떤 증거로 이런 저주의 말을 하는가? 이것뿐인가? 예수님께 나아가 주의 왕국이 임할 때 자기에게 가장 높은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고 은근히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막 10:37). 그의 제자됨에 대한 지나친 자의식이 불필요한 가정들을 낳게 했다. 그런 자가 요한일서 4:21에서“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라고 고백한 것은 오로지 주님의 은혜이다.

앞서가기로는 베드로를 빼놓을 수 없다. 앤드류 머레이가 그의 책 『완전한 순종』(생명의말씀사, 2014)에서 말한 것처럼,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기 전에도 귀신을 쫓아냈고 병자들을 고쳤다. 그런데도 그는 육신의 지배를 받았다. 그는 “우리 마음이 자신의 지배를 받는 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실 수 없다”라고 증거한다. 하나님을 방해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자만과 성급함과 과신이라는 것이다. 그의 결론은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라는 것이다. 가정과 기대마저도!

예수님의 복음을 살아낸 사도 바울은 또 어떤가? 그는 왜 안디옥부터 시작해 끊임없이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 크리스천들과 갈등을 겪어야만 했는가?(행 15:1-34) 바울의 회심 후 첫 번째 예루살렘 여행에서 만났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그를 두려워하고 피해야 했는가?(행 9:26-27) 이방인에 대한 할례 문제에 대해 결판을 짓고자 안디옥 교회를 떠난 바울과 바나나와 비할례인 디도는 2주간의 노정에서 어떤 상상과 가정을 했을까? 야고보와 게바(베드로)와 요한으로 대표되는 예루살렘 공의회는 바울의 확신(이방인에 대한 할례 문제)에 대해서 어떤 가정을 했을까? 이후 바울은 자신의 멘토와도 같았던 바나바와 꼭 갈라져야 했을까?(행 15:36-41) 왜 바울은 1차 전도여행 시 밤빌리아 버가에서 탈락해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간(행 13:13) 마가 요한의 행위를 배신으로 간주해(행 15:38) 용서하지 않았을까? 그는 사람에 대한 기대와 가정으로부터 자유로웠을까?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 했을까?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로부터 주어진 응당한 권위로 사람들을 용서하고 치유하는 것이 신성모독이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안식일에 병 고쳐 주시고, 누가복음 5장에서 더러운 자들과 함께 식사하시고(정결법의 문제), 마가복음 2장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등 예수님의 사역이 당시 서기관들과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신봉하던 율법과는 상반된다? 이들의 눈에 예수님의 사역은 사람의 아들이 벌이는 요상한 행위에 불과했던 것일까? 이들이 입에 달고 살던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예수님을 통해 보지 못한 건 무슨 이유에서인가? 이들의 눈에 덮어씌워진 율법과 정죄의 가정과 허물은 왜 이리 단단한가?

하지만 예수님을 처형하려면 ‘신성모독죄’만으론 불충분했다. 그래서 ‘선동죄’가 추가된다. 산헤드린 의회는 이제 거칠고 잔인하기로 소문난 빌라도를 불러들인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했지만, 대중의 선동과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당시 예루살렘의 민심은 부글부글 끓는 용광로와 같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역적인 기질을 충분히 아는 빌라도는 못 이기는 척 예수를 군중의 손에 넘겨 주고 자신은 빠진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눅 23:13-14),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준다(요 19:16). 그리고 당시 로마법에 따라 선동죄에만 국한된 십자가 처형을 실행하고, 직접 “유대의 왕”이라는 죄패를 써서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붙인다(요 19:19). 이래서 예수님의 죄목은 ‘유대인의 왕’이 되었고,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고 외치는(요 19:15) 군중들로부터 예수님은 배척을 당하게 된다. 불마차가 아니라 당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님이(우리들의 하나님이) 인간들의 터무니없는 가정과 기대와 모함으로 인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게 우리 인간들이다. 기대와 가정만으로 하늘의 신까지 지상의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는 자들! 그런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분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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