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자주 이 세상에 있는 물건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는데,‘존재의 유비법’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참 포도나무이다, 생명의 빵이다, 착한 목자이다, 길이다, 솟아나는 샘물이다... 더 많이 있다. 그렇게 미루어 보면, 그분은 어디에서인가 ‘나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선언하셨을 것 같다.‘산 위의 명강의’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마 5:13) 하셨는데, 이것은, “내가 세상의 소금인 것과 같이 너희도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일 것이 분명하다. “내가 세상의 빛이니까(요 8:12), 저희도 세상의 빛이니라”(마 5:14)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에베소교회에 있을 때, “너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라” 하고 편지 설교를 했다(딤후 2:20-22). 큰 집에는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이 있는데, 그 그릇은 무엇보다 안이 깨끗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요즈음의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계급론에서는 그 재료가 값을 결정한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깨끗하냐 아니면 더러우냐가 그릇의 값을 결정한다.

사도 바울의 이 같은 ‘사람 그릇론’은 그 뿌리를 역추적해 볼 때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은 눈이 먼 채로 금식기도 하는 바울에게 제자 아나니아를 보내 안수기도를 하게 하신다. 그때에 바울을 자신이 선택한 ‘그릇’이라고 하셨다. 이방사람들과 통치자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할 그릇이라는 말씀이었다(행 9:15). 그래서 바울도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너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라”하고 강조했다.

그처럼 예수님은 인간을 그릇으로 보셨다. 성경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무서운 경고를 퍼부으실 때에도 그릇을 사용하셨다. “너희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그 그릇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채워놓지 않았느냐? 먼저 안을 깨끗하게 해라. 그래야 겉도 깨끗하게 될 것이다.”그런 경고였다(마 23:25-26).

요즈음 젊은이들은 요강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방 윗목에는 어느 집이건 반드시 요강이 있었다. 소변 담는 그릇이지만 가끔은 대변 그릇도 된다. 질그릇으로 만든 것도 있었고 사기요강, 놋요강도 있었다. 그러나 주택 안에 수세식 화장실이 생기면서 요강은 방에서 퇴출되고 말았다. 그 시절에는 설교 가운데 자주 요강이 등장했다.  “예수 믿으면 똥오줌으로 가득 찬 더러운 요강이 변하여 깨끗한 밥그릇이 됩니다. 예수님의 피로 그 더러운 것들을 깨끗하게 씻어냈기 때문입니다.” 목청 높여 강조했던 설교 대목이다.

제주도였던가, 어느 민속박물관에 여러 종류의 요강들을 쭉 모아 놓은 걸 본 일이 있다. 물론 그 안이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요강들이 그릇들 중에서 가장 절묘하게 생긴 예술품처럼 보였다.
                                                           (대표저서: 목회자의 최고표준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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