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1-25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당신의 자녀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제로 잡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자유의사를 존중하십니다. 어둠을 벗어나 빛으로 가려면 우리가 돌아서야 합니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이란 소설에서 참 회개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줍니다. 주인공 이반이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육체의 고통과 정신적 절망감이 끔찍했습니다. 마치 어두운 자루 속에 갇힌 것 같았습니다. 눈앞이 캄캄하고 발버둥을 쳐도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 잠깐씩 진정되어 자신을 돌아보면 “내 인생이 크게 잘못되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곧 무서운 고통과 캄캄한 절망이 다시 덮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무심한 남편을 한결같이 사랑하고 헌신적으로 돌보아 주었지.” 이렇게 생각하자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습니다. 어린 아들이 병상 곁에 무릎을 꿇고 아빠의 손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을 때 이반은 속에서 북받치는 감격을 느꼈습니다.

그 후부터 그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비록 죽음의 병상에 누워 있을지라도 얼마든지 잘못된 것을 고칠 수 있고 새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고통은 여전했으나 절망의 어둠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그는 캄캄한 자루 속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얼마 후 이반은 평화 속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새 사람이 되어 생을 마친 것입니다.

캄캄한 자루 속에서 벗어나는 감격을 맛보길 원하십니까? 지금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만나길 원하십니까? 이 놀라운 체험의 필수 조건은 단 하나, 일어나 돌아가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구체적인 죄를 찾아내야 합니다. “회개해야지.” 이렇게 말만 해서는 안 됩니다. 빚을 갚는 행위가 뒤따라야 합니다. 빚진 자에게 가서 말해야 합니다. “참 잘못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피차 손해가 막심합니다. 자, 이젠 해결을 봅시다.” 정말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가로막는 장애물을 반드시 치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쳐 주시자, 유대인들이 꼬치꼬치 따졌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안식일 법을 무시하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일 수 있는가? 죄인이 어떻게 표적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소경으로 난 사람은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 9:25).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따졌지만, 소경으로 난 사람은 체험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실제 일어난 사건은 율법의 틀에 맞추어 재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체험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도록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규범이나 이성에 매이지 않습니다. 전통이나 관습의 지배를 받지도 않습니다. 캄캄한 자루 속에서 빛으로 나오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 미치도록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셔서 자기 자녀로 삼아야 할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갈보리에서 그 무거운 인간의 죄 짐을 지시고 매 맞으며 피 흘리실 까닭이 무엇입니까? 아무 이유도, 하등의 책임도 없으십니다. 있다면 오직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 온몸을 던져 경배할 뿐입니다.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한 여인이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선물을 가져가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자는 온갖 귀한 것들을 다 가져갔지만 모두 불합격이었는데, 마지막에 회개하는 사람의 눈물 한 방울로 천국문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귀향의 계절입니다. 지금이 회개의 때입니다. “어서 집으로 돌아오라.” 아버지께서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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