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처지에 있는 형제는 자신의 높은 위치를 자랑하고 부자는 자신의 낮은 위치를 자랑하십시오 이는 부자는 풀의 꽃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1:9-11).

맞아도 싼 아이

김기석 목사님의 글에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읽었습니다.

"한 아이가 시장에서 사과를 파는 여자가 물건을 진열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바구니의 윗부분에 맛있게 생긴 잘 익은 사과를 얹어 놓았고 아랫부분은 설익은 것들로 채워놓았다. 그 광경을 보고 눈에 불이 켜진 아홉 살짜리 소년은 바구니를 둘러엎어 그 여자의 장사를 망쳐 놓았다. 여자는 화가 치밀어 올라 욕을 해대며 아이를 때렸다. 아이는 욕설과 매질을 견뎠다.
이 용감한 아홉 살짜리 소년은 나중에 19세기 유대교 갱신운동의 주역이 된 렙 메나헴 멘들이다. 사람들은 그가 폴란드의 코츠크에서 살았다 하여 코츠커라고 부르기도 한다. 코츠커는 한평생을 오직 '진리' 추구에 매진했다. 그에게 있어 진리란 어떤 외부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는 자유를 의미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거짓을 미워했다. 거짓은 사람의 영혼을 비루함 속에 유폐시키는 감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물론 사람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약함을 넘어 위대한 영혼을 지향할 때 사람은 사람다워진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위험스럽기 그지없는 진리의 길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진리는 타협이 허락되지 않는 일종의 소환장인 것이다."

진리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길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아이가 욕설과 매질을 당했던 것처럼 진리의 길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것을 요구합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아무런 욕설과 매질을 당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인간의 나약함 뒤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외부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는 자유를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자유를 향해 매진하라고 권면합니다. 야고보 사도의 권면도 바로 그것입니다. '맞아도 싼 아이'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비천함

야고보 사도는 '나뉜 마음', 즉 두 마음에 대하여 언급한 다음 9-11절에서 '부와 가난'에 대해 말합니다. 10절의 부유한 자의 비천함이라는 말과 9절의 비천한 처지에 사용된 말의 어근은 같습니다. 낮은 형제, 즉 가난한 자가 '천하고 낮다'면, 부한 자도 똑같이 '천하고 낮다'는 것입니다.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을 야고보 사도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하신 말씀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성경의 메시지는 일관됩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성경은 언제나 그 반대로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높아진 만큼 낮아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일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바로 그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야고보서 1:9-11에서 말하는 부유한 자는 믿는 자들 가운데 부유한 형제들입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부한 형제"로 번역했지만 원문에는 '부유한 자'라고 쓰여 있습니다. 부한 형제들이지만 그들이 부를 자랑한다면, 믿지 않는 부자들과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4장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나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4:13-17)

야고보 사도는 당시 교회의 당연한 호칭인 형제라는 말조차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연약한 인간인 우리들은 믿음 생활을 잘하면서 부자가 되기를 꿈꿉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그것이 헛되고 허망한 것임을 말하기 위해 비천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가난하게 사는 것도 비천함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하지만 부유하게 사는 것이 그 비천함에서 벗어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야고보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비천함으로 인해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비천해지는 것을 자랑하라고 권면하기까지 합니다.

자랑할 수 있는 것

그렇다면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자랑해야 할 비참함이란 무엇일까요? 자랑해야 할 낮아짐이란 무엇일까요? 우선 그들이 가장 큰 자랑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그들의 부유함이 이 세상과 함께 덧없이 사라지는 부질없고 허망한 것임을 깨닫는데서 오는 겸손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교회는 지금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세상에서 성공한 것을 자랑합니다. 교회들은 그런 사람들을 불러 간증하게 하여, 믿음 생활을 잘하고 교회에 잘 다니면 누구나 성공하고 잘 살 수 있는 것처럼 유도합니다. 또 교회는 돈 많이 벌고 성공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시인하게 함으로써 개인적인 만족을 느끼게 하고 그들로부터 나오는 헌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만방에 자랑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자랑에 대한 지혜를 예레미야서 9장 23-24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성도들과 하나님 나라이어야 할 교회가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과 자랑해야 할 것은 명확히 구분되어 있습니다. 자랑해야 할 것은 지혜와 용맹함과 부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데서 나오는 생생하고 역동적인 삶 그 자체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강조하는 것처럼, 오직 긍휼과 정직을 행하는 참된 경건에 성도의 진정한 자랑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참 예배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랑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바뀐 자랑을 다시 세상 때문에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높아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끝까지 붙들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머무는 동안 복음 자체이신 예수님을 존귀하게 여기며 참 자랑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시험의 근본적인 배경

그러나 야고보 사도가 편지를 보내는 '세상 속에 흩어진 교회들'의 이해는 달랐습니다. 가난한 성도도, 부한 성도도 세상의 화려한 부에 마음이 쏠려 있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 문제를 부각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원하는 진짜 축복이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려고 했습니다. 그는 이사야서 40:6-7을 인용하였습니다.

풀의 꽃은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순식간에 시들고 사라집니다. 아름다운 순간이 너무도 짧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고 거기에 목을 맬 때 허망함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뜨거운 바람'이 불면 마르고 꽃은 떨어집니다. 풀의 꽃의 입장에서 보면 뜨거운 바람은 '심판의 날'과도 같습니다.

허망한 세상의 부를 좇는 이나, 하나님의 뜻에 아랑곳하지 않고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은 부자들이나(4:13-17), 자신들의 부로 온갖 사치와 향락을 누리면서도 가난한 자들의 몫을 빼앗는 악한 부자들은 그들 위에 떨어지는 불같은 심판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5:1-6).

화려한 로마제국의 변방에서, 본토에서 쫓겨나 변두리에서 살았던 '흩어진 열 두 지파', 곧 교회들에게 세상은 큰 유혹이었습니다. 가난한 소작농이거나 노예, 기껏해야 소규모의 상인이었을 성도들에게 주류사회의 풍요로운 삶이나 부한 형제들 그리고 세상 자랑이 그들의 믿음을 하찮게 여기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었어도 세상은 그들을 흔들 수 있었고 그들은 혼란 가운데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야고보 사도가 생각한 하나님 나라인 교회의 대적은 교회 안에 자리 잡기 시작한 세상의 강력한 유혹이었습니다. 시험의 근본적인 배경은 세상의 헛된 욕심과 잘못된 자랑이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사는 한, 우리에게 붙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두 마음으로 만들어 하나님을 반역하게 만들고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매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삶의 방식이 달라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가난이나 부함이 흔들지 못하는, 자족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이란 믿음을 통해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원하시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모든 성취와 기쁨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복음이신 예수님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여 주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기꺼이 '맞아도 싼 아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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