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14-15).

네다바이

중학교 시절, 제 아버지께선 페인트 대리점을 하고 계셨습니다. 어느 날 당시로서는 첨단 제품이라 할 수 있는 캐시미어 담요를 잔뜩 짊어진 잡상인이 들어왔습니다. 짐 꾸러미를 내려놓은 그는 담요를 사라고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원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잡상인은 점장에게 집중적으로 말을 걸었습니다. 반응이 없자 잡상인은 담요들을 주섬주섬 싸면서 독백하듯 한 마디 했습니다. "이렇게 조그만 가게에서 비싼 물건을 살 리 없지."

그 말을 들은 점장은 발끈하여 가져온 담요를 다 살 수 있다고 호기를 부렸습니다. 그러자 그 잡상인은 이런 조그만 가게에 그런 돈이 있다면 단돈 얼마에 담요를 모두 주겠다며 앞서 말한 담요 값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금액을 제시하였습니다. 점장은 여직원에게 돈을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잡상인은 큰일 났다는 듯 짐을 들고 황망히 가게를 나가려고 하였습니다. 점장은 잡상인을 붙들고 못 나가게 하였습니다.

얼마 후 여직원이 돈을 찾아왔습니다. 점장은 잡상인이 말한 금액의 돈을 던져주고 담요를 다 놓아두고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잡상인은 애원을 하였습니다. 제발 잘못했으니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점장은 의기양양하여 담요를 놔두고 돈을 가져가라고 하였습니다. 잡상인은 낭패라는 듯, 점장을 원망하며 가게를 나갔습니다. 점장과 직원들은 담요를 만져보며 횡재를 하였다는 듯 기뻐하였습니다.

그때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직원이 시장에 나가 캐시미어 담요값을 알아보았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담요 가격은 지불한 금액의 오분의 일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제야 자신들이 잡상인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소위 '네다바이'를 당한 것입니다. 사기꾼은 자존심을 자극하고 욕심을 이용해 멋진 사기극을 펼쳤던 것입니다.

시험

우리가 시험에 드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입니다. 그것을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시험에 들어 고통당하는 사람이 그 시험의 진정한 원인을 깨닫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나 사랑을 의심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시험 당하는 자의 그러한 오해를 불식시킨 후에 시험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오해를 불식했으니 문제의 핵심을 짚는 것입니다. "도리어 각 사람이 자신의 정욕에 이끌리고 걸려들어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는 그 정욕이 그것을 받아들여 죄를 낳고, 그 죄가 완전히 자라고 나면 결국 죽음을 낳게 됩니다."

죽음을 향해 가는 시험의 단계들

짧은 구절에 사람이 잘못된 욕심에 의해 사망에 이르는 전 과정을 단계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단계는 이끌림, 걸려듦, 받아들임, 죄를 낳음, 죄가 자람 그리고 죽음의 여섯 단계입니다.

1) 이끌림
'이끌리고'(엑셀코메노스)는 사람의 어떤 정욕이 잘못된 대상을 향해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리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정욕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히브리어의 '예쩨르'에 해당하는 '에피쑤시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생명적인 발현이며,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식욕, 성욕, 명예욕, 인정받고 싶은 욕구, 남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욕구, 소속되고 싶은 욕구, 기억되고 싶은 욕구 등 모든 욕구들은 인간이 당연히 가지고 있는 실존의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욕은 인생의 추진력과 같은 것이므로, 그 자체를 악한 것으로 금기시해선 안 됩니다. 하지만 정욕이 죄와 함께 발현되는 것을 용납해선 안 됩니다. 욕구나 정욕들은 그 자체로는 방향성이 없으므로 보다 높은 가치와 지혜, 지식과 의지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실제로 '정욕'은 종종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과 타락한 세상의 환경 속에서 정욕의 방향이나 목적이 자주 잘못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욕구나 정욕은 인간의 실존에 필요한 것이지만 그 대상이 잘못 정해지면 죄를 짓게 됩니다. 따라서 14절에서 정욕이 이끌리어 나가는 모양은 이미 잘못된 대상이나 방향으로 나아감을 뜻합니다. 이것이 시험의 발단이요, 시험이 시작되는 첫 단계입니다.

2) 걸려듦
그 다음 단계는 걸려듦입니다. 개역개정판은 '미혹됨'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정욕이 잘못된 대상을 향해 잘못된 방향으로 계속 가서 그 주변에 머물다가 결국 덫에 걸리는 형국입니다. 덫에 걸릴 때까지는 망설임도 있고, 주의도 하지만, 일단 덫에 걸리면 정말 시험에 든 것입니다.

3) 받아들임
그 다음은 받아들임입니다. '일단 받아들인 후에는'(술라부사)이라는 표현은 또 다른 단계입니다. 정욕이 일어나고, 잘못된 대상을 향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다가 덫에 걸린 다음, 보다 적극적으로 그 대상과 덫을 함께 끌어안은 모양새가 됩니다.

4) 죄를 낳음
고보 사도는 사람이 유혹에 빠져서 시험에 들고 파국을 향해 내달리는 모습을 생명의 발현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죄를 낳는다든지 사망을 낳는다는 표현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시험에 든 사람은 적극적으로 죄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는 유혹을 받아 이끌리고 걸려들 뿐 아니라 그 잘못된 대상과 덫을 함께 끌어안게 되고, 결국은 죄를 낳고 맙니다. 여기서 죄를 '낳는다'에 해당하는 '틱테이'라는 단어는 풀꽃이나 나무에 작은 열매가 솟아나듯, 혹은 열매를 맺은 후 그 씨앗이 땅에 떨어지듯 어떤 행동의 결과가 일단 매듭지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었고, 과정이 분명한 결과로 매듭지어졌습니다. 그는 죄를 범했습니다.

5) 죄가 자람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죄를 방치하고 키우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 단계가 '죄가 완전히 자라난'(아포텔레스타이사) 단계라고 말합니다. 그 의미는 어떤 일련의 과정이 그 주어진 마지막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을 가리킵니다.

야고보서의 서두에서 인내의 결과로 '온전한' 모습에 이른 것처럼 유혹을 따라 죄를 품어 그 죄가 '온전히' 자란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 생명의 잉태와 성장, 출산 과정을 거치지만 그 결과가 완전히 반대입니다. 하나는 생명의 면류관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인 것입니다.

6) 죽음을 낳음
시험을 받아 죄를 품고 그 죄를 놓지 않는 경우, 그 죄는 장성하여 원래 정해진 목적지인 사망에 이릅니다. 야고보 사도는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표현합니다. 죄를 낳는 경우와 마찬가지이지만 여기서는 죄를 '낳는다'의 경우보다 더 크고 장성한 무엇이 '쑤욱' 나온다는 의미의 동사 '아코푸에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길

시험에 지면 결국 죽음에 이릅니다. 야고보 사도가 묘사한 이 과정은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필연적으로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5).

하지만 죽음에 이르는 이 과정은 역설적으로 은혜의 과정입니다. 유혹에 이끌리는 시작의 단계에서 사망의 단계까지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고 각각의 단계들은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러 차례 돌아설 수 있는 회개의 기회들이 주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시험에 들었다고 바로 죽지 않습니다. 시험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성령의 탄식을 무시하며, 죄를 슬퍼하지 않는 자에게는 그 은혜가 무용지물이겠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에 귀를 기울이며, 죄를 슬퍼하는 성도에게는 복된 기회가 됩니다. 사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인내, 하나님의 기다리심,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우습게 여기지 않는다면 시험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1:4) 온전한 성도가 되는 은혜의 길로 변합니다.

시험이라는 선물

필립 얀시의 책 『고통이라는 선물』의 주인공인 폴 브랜드 박사는 평생 한센 병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나병, 문둥병이라 불려던 한센 병은 살이 문드러지고 손가락이나 코가 떨어지고 눈이 멀기도 하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래서 한센 병 환자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저주를 받은 거라면서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했습니다.

브랜드 박사는 한센 병균이 살을 썩게 하고 신체 일부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 신경을 마비시켜 고통을 느끼지 못해 신체가 훼손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고통을 느끼는 신경이 마비되면 뜨거운 것을 만져도 통증을 느끼지 못합니다. 신발 때문에 발이 부어도, 발이 삐끗해도 통증을 느끼지 못합니다. 눈 속으로 하루살이가 날아들어도 눈을 감지 못합니다. 심지어 쥐가 손가락을 뜯어먹어도 통증을 모릅니다. 균에 감염된 신체 일부가 썩어 떨어져 나가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폴 브랜드 박사는 고통이야말로 신체를 보존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시험이 없다면 한센 병 환자처럼 인생이 비참한 지경이 되어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시험은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시험은 우리의 곤고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가 되고 큰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사람들은 시험을 느낄 수 있는 신경이 마비됩니다. 자기의 영혼이 썩어 문드러져 떨어져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들의 나라입니다. 작은 자들은 시험을 느낄 수 있는 신경이 살아 있습니다. 작은 자들만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작은 자들만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교회 문턱을 넘나들면서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시험을 시험으로 느낄 수 있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세상으로 향하는 마음이 잘못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뜻과 인도하심에 따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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