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18

창세기 20장을 읽다 보면 창세기 12장 사건이 재현되는 듯한 기시감(旣視感, 데자뷔)을 느낀다. 12장과 20장이 상당히 유사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세기 20장은 종종 잘못 읽히거나 창세기 12장 사건의 아류 정도로 취급되곤 했다. 앞선 사건에 대한 이미지 때문에 이 본문을 독립적으로 다룰 필요를 느끼지 못하거나, 다룬다 해도 창세기 12장에 대한 선이해로 인해 오독하는 경우들이 많다.

아브라함이 그랄 왕 아비멜렉 앞에서 아내 사라를 여동생이라 속이는 내용은 소위 아내-여동생 이야기의 전형 장면(Type-Scene)에 속한다. 전형 장면에선 먼저 앞선 이야기와의 상관 관계를 주목하고, 다음으로 자체 문맥 안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어떻게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본문은 큰 틀에서 12장 사건을 반복해 동일한 주제를 이어간다고 볼 수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창세기 20장이 속한 문맥에 의해 상당히 달라진다. 본문의 문맥 속에서 이해하면, 이 사건은 창세기 17-18장에서 사라가 일년 안에 이삭을 낳을 것이라는 고지를 받은 이후, 그리고 창세기 21장 이삭의 출생 이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사라가 불임이었고 조카 롯이 중요한 역할을 하던 창세기 12장의 맥락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런 차이점들이 창세기 12장과 20장의 메시지를 전혀 다르게 이해하도록 만든다.

헤브론 마므레 상수리 나무 근처에 거주하던 아브라함은 네게브에 속한 그랄 땅으로 내려갔다. 12장에서는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 갔다고 말하지만, 20장은 왜 그랄로 내려갔는지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물론 그랄 땅은 가나안 에 속했기 때문에, 12장처럼 땅에 대한 위기는 처음부터 없었다. 이런 장소와 상황의 차이 때문에 비슷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매우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몇 가지 의문점도 생긴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말하고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내로 데려갔을 때, 사라의 나이가 89세였다. 뭔가 이상하다. 창세기 12장에서는 애굽에 내려간 사라가 “매우 아름답다”는 칭찬을 들었다. 용모의 아름다움이 바로 왕과의 결혼에서 중요한 이유였다(세 번째 이야기인 26장에서도 리브가의 아름다움은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27:6). 그러나 20장에선 사라의 아름다움에 대한 언급이 없다. 20장에선 아비멜렉이 사라를 선택한 이유가 미모 때문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오히려 아비멜렉과 사라의 결혼에 정략적인 의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브라함은 이미 도시 국가의 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부요했고 군사도 많았으며, 그 힘도 입증되어 있었기 때문에(창세기 14장 참조), 그랄 왕 아비멜렉은 정략 결혼을 통해 서로 간의 평화를 원했을 수 있다.

중세에 판화로 제작된 성경 삽화

아브라함의 행동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인지는 문맥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브라함은 낯선 땅으로 갈 때면 으레 해왔던 대로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인 것 같다(13절). 성경에는 두 번만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두 번 이상 동일한 상황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차례로 약속의 자녀에 대한 예언을 하셨다(창 17:15-19; 18:9-14). 약속을 받았음에도 아내를 여동생이라 속이고 아비멜렉에게 보내려 했던 아브라함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으로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도 아브라함은 아비멜렉 앞에서 의연하지 못하고 변명하기에 바쁘다.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불러올 뿐이다.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분명한 잘못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중대한 위험에 처했다.

그런데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 급하게 행동하셨음이 본문 전체에서 감지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아비멜렉의 집으로 들어간 바로 그 날 밤, 아비멜렉의 꿈속에 나타나셔서 사라를 가까이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하루도 지체하지 않고 나타나신 것은 약속의 자녀를 낳게 될 사라를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시기 전에 이미 집안에 태를 닫는 심판을 행하셨음을 알 수 있다(18절에 이 말씀을 추가하는 것은 일종의 문학적 회상 기법으로 하나님의 행하심을 극적으로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다행히 아비멜렉은 아직 사라를 가까이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사라의 순결을 확인해 주셨다. 이는 창세기 12장에서 사라가 얼마나 오랫동안 바로의 집에 머물렀는지, 성적인 접촉이 있었는지, 심지어 바로 왕의 집에 내리신 하나님의 재앙이 어떤 것인지 거의 관심이 없었던 것에 비하면 대단히 놀라운 접근이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으로부터 사라의 순결을 지키심으로써 약속의 후손을 위기에서 구하셨다. 아브라함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당신의 신실하심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을 지켜 주셨음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윤리적, 신앙적 후퇴는 하나님의 즉각적인 개입을 필요로 했다. 12장에서 하나님은 무대의 중심에서 모든 상황을 바꾸신 분이지만, 본문의 등장인물들에게는 나타나시지 않고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12:17). 하지만 20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먼저 이방의 왕을 찾아오시고 당신의 뜻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방인에게 나타나신 성경의 첫 번째 사례이다. 적극적으로 아비멜렉의 집에 재앙을 내리셨고, 이방 왕 앞에서 아브라함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비록 연약해서 실패했지만, 아비멜렉이 치유되려면 반드시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해야 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이방 왕 앞에서 아브라함의 지위를 회복시키셨다(7절).

이제까지 아브라함은 이방 왕들에게 재앙의 원인 노릇을 했다. 그의 불신앙과 연약함 때문이었다. 소돔의 멸망(19장)은 그들의 죄로 인해 예견된 일이었으나, 아비멜렉의 재앙은 달라 보인다. 아브라함은 신앙적으로 퇴보한 데 비해 아비멜렉은 의로운 백성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라고 항변하는 아비멜렉의 모습이 소돔 성 사람들과 대조된다.

소돔 성 멸망에 앞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실 나라가 의와 공도를 행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 말씀하셨고, 그를 통해 천하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창 18:18-19). 이방 왕 아비멜렉 앞에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소개하셨고, 아브라함은 기도를 통해 아비멜렉 가문에 내린 하나님의 재앙을 그치게 하고 질병을 회복시켰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가문에 내리신 재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본문 17절과 18절이 명백하게 밝힌다. 그 재앙은 아비멜렉 가문의 “출산”과 관련되었다. 1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재앙을 내리셨는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20장에서는 출산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부각시키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장 소돔 성의 멸망은 불행한 이야기지만 롯의 딸들의 출산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20장도 아비멜렉 집안의 출산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하나님은 출산케 하시는 분이다. 특별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닫혔던 아비멜렉 집안의 태를 열었다. 그렇다면 마땅히 자신의 아내 사라의 출산을 위해 기도하며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17장에서 시작된 출산 이야기는 이제 아브라함이 기도해 출산케 하는 장면에서 기대감이 최고조에 달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손의 출생도 임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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