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6-27).

바른 신앙생활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말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혀를 재갈 물리지"라고 표현합니다. 혀에 재갈을 물린다는 것은 말을 통제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른 신앙생활의 첫 번째 과제는 말의 통제로부터 시작합니다. 말을 통제하지 못하면 경건한 신앙생활도 헛것이 되고 맙니다. 여기서 헛것이란 말 그대로 속이 텅 빈 것을 뜻합니다. 가치 없는 빈껍데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여러 번에 걸쳐 말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말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 다른 사람 그리고 피조물과의 관계 회복으로 이어집니다. 거기에서 말은 겉으로 드러나는 가장 명확한 변화입니다. 우리는 말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으며 얼마나 상처를 줄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거짓을 말하거나,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충분히 귀 기울여 듣고 상대방에게 편안함과 위로와 힘을 줄 수 있는 말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그 일은 오랜 훈련과 깊은 영성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태어난 하나님 백성들의 마음에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혀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혀에 재갈을 물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생활이며 참된 경건의 표지입니다. 말을 통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성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또 행위로 열매를 맺어 생명과 복을 누리는 자리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합니다.

긍휼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마음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속이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정신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를 속이는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의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마음의 변화는 다른 말로 긍휼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바른 신앙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역지사지'의 마음, 그리고 상대방을 긍휼하게 여기는 '측은지심'이야말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변화되고 있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심령에 심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과 긍휼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고아와 과부들의 아버지로 불리셨습니다.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58:5). 예수님께서도 구약의 율법을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실 만큼 이웃에 대한 긍휼은 하나님 말씀의 근간입니다.

바른 신앙은 그런 긍휼이 피를 나누지 않은 다른 이들에게도 느껴질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보실 때마다 애간장이 끊어지는(스플랑크니쪼마이) 긍휼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는 것처럼 사람들을 품으셨습니다.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긍휼의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마음을 속이는' 경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긍휼의 마음을 가질 때 우리의 혀, 우리의 말은 마음에 심긴 말씀에 따라 움직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혀, 마음과 말, 마음과 삶이 하나가 되면서 심령에 심긴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 말씀의 생명이 꽃처럼 피어나고, 열매처럼 우리의 삶 속에 맺힙니다. 하지만 심령에 심긴 말씀과 우리의 말이 서로 다른 길을 달리면 껍데기 신앙만 남습니다.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정결

마지막은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자기를 지키는 삶입니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이라는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여기서 '세속'이란 원래 '세상'(코스모스)이지만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주권과 의지, 그분의 구원과 심판의 섭리를 아랑곳하지 않는, 영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하는 세상의 총체를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분법적으로 세상과 교회를 구분하려고 이 말씀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세상 한복판에서, 직장이나 학교, 정치나 경제적 활동을 하는 그 한복판에서 참된 경건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헛된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문대로 세상보다는 세속이라는 번역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세속적이 될 수 있고, 세상 한복판에서도 얼마든지 경건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테레인)이라 할 때, 그 지킨다는 표현은 어떤 물건이나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감시하고 보호하고 지켜낸다는 뜻이 있지만, 종교적 율례나 의례들을 규칙적으로 준수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만일 종교적 율례나 의례들을 규칙적으로 준수한다는 의미를 염두에 두었다면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 백성들이 신앙생활의 외적인 요구 사항들을 지키는 것으로 스스로 경건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든지 세상 속에 있든지 모든 더러운 것들과 악한 것들에서 자신을 지킴으로써 비로소 경건해진다고 말하는 셈이 됩니다. 따라서 정말 지켜야 할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행위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고 야고보 사도는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생각하지 않고 일상적인 일을 하는 것이며, 내가 할 수 있는 한 순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다른 시간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착각입니다. 기도 시간에 기도에 매달리는 것과 똑같이 일하는 시간에도 하나님께 꼭 매달려야 합니다." (로렌스 수사)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날마다 세상으로부터 엄청난 압박을 받습니다. 젊음을 즐기고,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참된 삶이라는 메시지를 수없이 듣습니다. 그런 삶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러한 메시지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현실 극복이 아니라 현실로부터의 도피라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세상의 압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우리 안에 심겨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에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진리가 주는 자유를 비로소 누리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됩니다. 날마다 식탁에 올라오는 밥이나 반찬 하나에도 누군가의 노력과 희생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 인구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는데 우리는 살을 빼기 위해 돈을 쏟아 붓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강도 만난 이웃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치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창조주의 손길을 인식한다는 것은 이웃의 신음 소리를 듣고 함께 아파하는 긍휼로부터 싹튼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삶이야말로 세속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정결한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저를 가난한 밥상으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이 어찌될지 모른다는 것,
덕분에 저는 주님의 계획을 온전히 보게 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아님에 가장 걸 맞는 옷입니다.
그 빈 순수한 공간 속으로
저를 불러 앉히시고
생생한 만나와 까마귀가 여전히 당신 손안에 있음을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가난하지 않고는
결코 당신의 부요함을 누릴 수 없기에
기꺼이 나를 가난케 하신 당신의 사랑을
감사하나이다.(조희선 시인, 빈자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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