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중이 사라진 교회의 현실

하나님의 미션에 동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뤄지도록 돕는 교회는 개인의 분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삶은 결코 교회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교회에 문제가 많아도 교회는 교회이고, 우리의 신앙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해서, 교회와 함께 성장한다. 교회가 교회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교인 각 개인의 양심과 판단과 분별의 능력들은 자라나지 못하고 질식사하게 된다. 담임 목회자가 성도 각 개인을 어떤 관점으로 보고 섬기고 가르치냐에 따라 교인들의 분별 수준 및 정도가 달라진다.

아직도 여러분의 목회자는 여러분을 아이 취급하고 있는가?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떻게 분별의 영과 능력과 지혜를 길러왔고 배워왔는가? 여러분의 목회자는 얼마나 성도 개인의(교회 집단이 아닌) 자발적인 분별을 강조해 왔는가? 교회의 성장이 중요한 만큼 개인의 성장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들어왔는가? 목회자에게 안식년이 필요하다면 성도 각 개인에게도 필요하지 않은가? 교회의 의사 결정은 누가 해왔는가? 어떤 원칙으로 해왔는가? 만장일치인가? 다수결인가? 다른 의견을 내는 자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어느 정도인가?

이 모든 과정에 성도 각 개인이 참여하지 않고, 목소리를 낼 수 없고, 의사를 반영시킬 수 없다면, 성도 각 개인의 분별력은 결코 자랄 수 없다. 이는 가정에서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의사 결정 과정에서 아이들의 의견이 무시되는 것과 같다. 문제는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의 분별력 역시 형편없게 된다는 것이다.

일전에 횃불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치는 이강학 교수가 횃불 트리니티 저널 제17권 1호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적 분별:『구별하는 표지』와『종교적 정서론』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표한 글에 다음과 같은 조사 결과가 수록되어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분별할 때, 첫째로 목회자와 상담을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예언의 은사가 있는 분들을 만나 예언을 듣고 분별하며, 셋째가 성경 말씀이고, 넷째는 일상의 현상, 다섯째는 꿈으로 분별한다고 했다.

이 조사 결과를 보면서, 첫째와 둘째의 분별 기준이 자신이 아닌 타인이라는 것, 그것도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이 필자에게는 점검 대상이 된다. 왜 목사나 예언자를 우선적으로 찾아갈까? “건전하지 않아? 목회자와 상담하는 게 뭐가 나빠?”라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집단주의나 권위주의의 영향이 아닌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사안의 정도나 깊이에 따라 다를 테지만, 서구인들의 기본적인 통념은, ‘내가 결정한다’이고, 이는 교회라고 다르지 않다. 목회자는 목회자의 직분을 감당하는 자일 뿐이다. 500년 전 독일인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교황을 만나 종교개혁을 해도 되는지를 물어보고 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미국에서 필자가 출석했던 동부의 한 한인교회 생각이 난다. 식당 개업을 준비하던 한 교인이 식당자리가 나왔다고 맨처음 상의한 자가 목회자였고, 그 자리를 구입하라고 지시한 자도 목회자였다. 결국 그 식당은 성공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그 식당 주인이자 목회자를 열렬히 신뢰하게 된 그 교인은 두 번째 식당 자리에 대해 그  목회자와 상담했고, 목회자가 구입하라는 곳을 임대해 2호점을 열었다. 그런데 두 번째 식당은 실패하고 말았다. 고스란히 망했다.

목회자 의존적이고 목회자 중심적인 결정과 분별의 사례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생기고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성도로서 직접 교회의 문제들을 시시콜콜 결정하고 있는가? 어느 주일 교회에 갔더니 난데없이 처음 보는 목사가 설교하고 있었던 적은 없는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를 고민해 본 적은 없는가?

교회의 의사 결정에 성도의 참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성도 각 개인의 분별력은 좋아질 것이다. 대신 교회는 더욱 느려질 것이고(의사 결정에 참가하는 자들이 많아졌을 것이므로), 교인들의 머리는 점점 빨라질 것이다. 이게 성숙해지는 것 아닌가?

집단의 분별 역시 개인의 문제

개인이 살아야 집단이 살기 때문에 개인의 분별이 없는 집단/교회의 분별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분별력에 관한 수많은 책들은 집단보다는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밀밭의 가라지』의 저자인 예수회의 토마스 그린 신부 역시 이 책 말미에 공동체/교회의 분별에 대해 할애하면서, ‘분별의 진정한 문제는 공동체적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동체/교회의 분별이 잘못 행해졌을 때 생겨나는‘다수의 횡포’나 ‘하나님을 조정하는 문제’에서 벗어나 분별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분별하는 개인이 먼저 되어야 한다. 즉 집단주의와 집단사고의 횡포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각 개인의 분별 수준이 좋아야 한다는 것! 토마스 그린 신부의 말이다. “나는 개인들이 기도 충만하고 분별하는 사람들이라면 공동체가 함께 분별하는 일도 어렵지 않을 것이며,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공동체의 분별 또한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분별하는 개인으로 구성된 교회는 문제될 게 없다. 각 교인이 분별의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교회는 결코 느슨하거나 편안할 수 없다. 목회자가 교인을 함부로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그 반대도 마찬가지). 그렇기 때문에 성도 각 개인의 분별을 강조하는 교회는 결코 조용할 수 없다. 늘 적정한 위기감이나 긴장감이 감돌게 될 것이다. 쉽게 결정되는 법이 없을 것이다. 피곤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긴장감이 풀어질 때 우리의 마음 역시 타락한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목회자와 회중이 공히 존중되고, 주인 되는 교회가 아닌,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의 머리를 발로 짓밟고 일방적인 집단사고가 횡행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생의 삶이 다시 올 세상 사이에 끼여 있는 것처럼, 그래서 심히 불편하고 고단한 것처럼, 우리들의 교회도 다시 올 천국 중간에 어중간히 끼여 있어 불편해야 마땅하다. 필자는 이런 불편함 앞에 ‘거룩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거룩한 불편함.’ 우리는 지금 여기서 ‘거룩한 불편함’그리고 그 긴장감과 화해하며 살아야 한다.

여기서 더 편해지고 싶을 때, 더 빨리 가고 싶을 때, 더 큰 것을 갖고 싶을 때, 나를 방해하는 방해물(가라지)들을 죄다 없애고 싶을 때, 그때가 사탄이 혀를 날름거리며 유혹하고 있음을 명심하라. 쉽게 교회 건물을 짓고 쉽게 사람을 내보내고 쉽게 또 쉽게 무슨 일이든 한다면 우리들의 머리는 텅텅 비워지고, 그 속은 사도바울이 이야기했듯이, 세상의 온갖 오물과 찌꺼기들로 가득 채워지게 될 것이고, 우리들의 삶은 회칠한 무덤으로 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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