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일생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쳐 준다"

아브라함 열전(11)

아브라함 이야기를 관통하는 중대한 긴장은 하나님의 약속과 사라의 불임이라는 상반된 사실에서 비롯되었다(11:30).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은 약속과 현실 간의 갈등에서 시작되었고, 무려 25년이 지난 뒤에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후손의 출생으로 시작되는데, 이미 100세가 된 아브라함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 모두 포기한 시점에,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개입하신 획기적인 사건이 바로 이삭의 출생이었다.

모든 소망이 끊어진 아브라함과 사라를 하나님께서 친히 방문하셨다. 아브라함의 거듭된 오해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기나긴 여정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성장하게 하셨고 결국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이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이끌어 오셨음을 강조하기 위해 본문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는 표현을 두 번 반복한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아들을 주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지었다. 이삭은 “웃는다”는 뜻으로, 여기에는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계시해 주셨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웃었다(창 17:17, 19; 18:12-13).

이제 그들은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웃었던 그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또한 본문은 노년에 얻은 아들로 인해 아브라함과 사라가 기뻐하며 웃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이삭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인한 기쁨과 자신들의 불신앙의 웃음을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장치다.

팔십육 세의 나이에 얻은 이스마엘을 약속의 자녀로 알고 양육해 왔던 아브라함은 이제 중대한 기로에 섰다. 그런 면에서 이삭의 출생 이야기와 이스마엘의 떠남 이야기가 연결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삭이 젖을 뗀 것을 기뻐하는 잔치에서 갈등이 생겼다. 대개 젖 떼는 시기를 3년 후 정도로 추정한다. 유아 사망률이 높은 시대였기에 이 잔치는 일종의 돌잔치와 같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기쁨이 묻어나는 성대한 잔치 자리에서 하갈의 아들이 이삭(이츠학)을 놀리는(메차헥) 장면을 사라가 목격한다. 놀린다는 말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실제로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어떻게 했는지 알 길은 없다. 아마도 이삭의 이름을 가지고 놀렸거나(실제로 이삭이라는 이름과 놀린다는 히브리어는 같은 단어로 언어 유희에 해당한다), 부정적으로 이삭을 괴롭혔을 수도 있다(갈 4:29).

하지만 본문은 하갈의 아들이 어떤 행위를 했느냐보다 사라가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에 치중한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달려와 분노하며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강력하게 요구한다. 사라에게 있어서 하갈의 아들은 이삭의 유업을 위협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요구가 정당해 보이지 않는다. 이집트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아들을 낳게 한 이가 바로 사라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남달랐을 것이다. 이스마엘은 여전히 아브라함의 “자식” (11절)이었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 아브라함의 고민이 깊어졌다. 약속의 후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졌지만, 그동안 이스마엘에게 온갖 정성을 쏟은 그였다. 하나님이 후손을 약속하실 때, 그냥 이스마엘이나 잘 돌봐달라고 간청했던 그가 아닌가!

 

이 중대한 문제 해결에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셨다. 하갈의 아들을 내보낼 뿐 아니라, 이삭이 참된 약속의 씨임을 다시 확인해 주셨다. 사실 21장 이야기 자체에서 이삭이 참된 약속의 씨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삭이라는 이름을 반복해서 사용해 왔다. 저자는 이삭이라는 이름을 6번에 걸쳐 사용했을 뿐 아니라(3, 4, 5, 8, 10, 12절), 이삭을 떠올리는 언어 유희로서 동일 어근의 단어를 세 번 더 사용했다(6, 9절). 그런 반면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의도적으로 본문에 기록되지 않았다. 하갈의 아들, 종의 아들, 아이, 소년 등으로만 불렸다.

약속의 자녀가 확정되었기에 이스마엘과의 헤어짐은 창세기 전체 문맥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스마엘은 이제 창세기의 무대 중심에서 내려올 때가 되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마음을 위로하듯, 하나님은 하갈의 아들 역시 아브라함의 씨이기에 한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다. 이는 사라의 요구의 정당성에 대한 확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보호하셔서 큰 민족이 되게 하실 것에 대한 확증이다. 하나님의 뜻을 확인한 아브라함은 결국 하갈과 그의 아들을 집에서 내보낸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사흘치 식량과 물을 준비해서 두 사람을 내보냈다. 아브라함은 왜 이렇게 적은 양을 주어 두 사람을 내보냈을까? 14절을 보면, 사라도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여종이라고 부르신 그녀를 아브라함은 하갈이라고 불러 준다. 물과 식량을 직접 하갈의 어깨에 지워 주고 보낸다. 사라는 쫓아내라고 했지만, 아브라함은 배웅하며 내보낸다. 하갈은 16장에서 술 광야로 내려갔던 것과 달리 멀리 가지 않고 브엘세바 들판에 머무른다. 멀리 떠날 의도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아브라함은 하갈에게 모든 것을 준비시킨 이후에 이스마엘을 데리고 가게 한다(14절). 마지막까지 아들을 놓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 준다.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던 하갈은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지자 아들을 관목 아래 두고 깊은 절망감에 눈물을 흘린다. 21장에서 이스마엘의 죽음의 위기는 22장에서 이삭의 죽음의 위기와 상당히 유사하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이삭을 데리고 나무를 준비해 떠났다(21:14; 22:3). 또한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나무를 이삭의 등에 지웠다(22:6). 아브라함은 멀리 모리아산을 보았고(22:4), 하갈은 아들의 죽음을 보지 않으려고 멀리 앉았다(21:16).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 하갈을 불렀고 (21:17), 아브라함을 부르셨다(22:11). 하갈은 목소리를 높여(lift up) 울었고,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lift up) 양을 보았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두려워 말라며 하나님께서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말하고(21:17),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22:12, 18). 이와 같은 이스마엘과 이삭 간의 평행은 아브라함이 유사한 운명이라 예상한 두 사람의 길이 달라질 것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살리셨으며, “그 아이와 함께 계셨다.” 이스마엘은 광야의 사람이 되었으며 활쏘는 자가 되었다.

아브라함의 일생이 그의 믿음의 여정을 보여 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쳐 준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을 주셨던 분이 하나님이시다. 숱하게 어려웠던 순간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긴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를 돌보셨고, 약속하신 대로 후손을 주셨다.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절정에 이른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후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갈 3:16).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주어진 약속의 말씀을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할까? 시대는 바뀌어도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신실하심은 불변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변하는 상황이 아니라 변하지 않으시는 그분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매순간 약속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는 우리의 고백은 단 한 마디면 족하다: “아멘”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