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하지만 불안한 세대” 저는 이 시대의 특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컴퓨터의 발달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어디까지 대신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불안해집니다. 우리는 책상 앞에서 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식을 거의 실시간으로 듣고 원하는 물건을 빠르고 싸게 주문하고 집에서 전달받습니다. 구석진 방에서도 전 세계 불특정 다수의 사람과 공통의 관심사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니터의 팝업창에 뜨는 광고의 내용이나 뉴스의 배열이 내게 지나치게 맞춤형으로 제공되는 것을 볼 때, 나의 흔적이 어딘가에 기록으로 남고 누군가가 내 생활을 들여다 보고 있다는 생각에 불안해집니다. 강대국의 최고 수뇌부들이 머리를 맞대어도 해법을 찾지 못하는 북핵 문제나 자생적 테러 문제, 첨단 과학기술과 장비로도 막을 수 없는 지진과 산불, 기상이변 등의 현상들을 보노라면 종말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릅니다. 인간의 무기력과 심성의 강퍅함에 한숨이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 오릅니다. 그럴수록 원만한 인생살이를 위해 반드시 있어야 세 가지가 절실하게 떠오릅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믿음은 불안을 이기는 힘입니다. 소망은 환난을 견디게 하고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믿고 어디에 소망을 두고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물질적인 것은 결코 그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불안과 두려움의 근본원인은 결핍으로 인해 발생합니다. 인간이 소유하려 하는 모든 물질과 그로부터 기인한 것들은 전부 다 유한하고 제한적입니다. 돈, 건강, 시간, 기회, 자원들... 이것들은 사용하고 나면 사라지는 것이고, 모두가 사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들입니다. 소유의 충만함이 주는 행복을 아는 사람들은 더 많이 가지려고 경쟁하고 더 오래 가지려고 욕심을 냅니다. 실제로 조금이라도 더 가지게 되면 인심도 좋아지고 삶의 만족도도 높아집니다. 하지만 그 또한 일시적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소유한 그것도 언젠가는 고갈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충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을까요? 충만한 것은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고,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며, 육적인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입니다. 충만함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은 제한적이고 불충분한 상황 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 힘과 마음을 얻습니다. 어리광만 부리던 아이가 새학년 첫날 학교 수업을 잘 마치고 돌아와 간식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 엄마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고 말합니다. 초등학교 동창 남자와 결혼하여 지순한 사랑을 받았던 아내는 자신에게 닥친 난치병과의 오랜 투병생활 중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가택 연금 상태에 있는 바울이 상업이 발달한 도시 에베소와 정치적 특권을 누리는 도시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쓴 편지를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그 편지를 읽다보면 대체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격려했어야 하는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바울이 그리 말할 수 있던 것은 그가 충만한 어떤 것으로 인해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인 조건으로 인한 고난보다는 정신적이고 관계론적인 가치가 더 크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어야 하고, 소망으로 품어야 하며, 사랑해야 할 대상은 바로 신령한 복입니다. 신령한 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충만함이며, 하나님에 의해 충만케 되신 분입니다. 또한 만물을 충만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으로 충만하다면 우리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결핍과 그로 인한 불안감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Be filled by Christ”(엡 1:23). 늘 오고 가는 도로 위의 간판에 이런 광고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Keep Christ in Christmas.’ 불안의 시대를 살고 있는 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이 시대를 향해 외치고 싶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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