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열전(13)

노년에 얻은 아들 이삭의 존재는 아브라함에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에 걸쳐 이삭에 대해 말씀해 주셨듯이, 그는 약속을 받아 태어났다. 금지옥엽으로 길렀던 이스마엘조차 이삭에게 온전한 복을 전수하기 위해 내보내야 했다(창세기 21장). 그야말로 이삭에게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주관해 오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을 하신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갈데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심과 아름다운  평행을 이룬다(창세기 12:1-3). 창세기 12장과 22장을 대칭적으로 연결시켜 아브라함 이야기의 시작과 결론부를 형성하려는 문학적 의도를 엿볼 수 있다(창세기 23-25장은 부록과도 같음).

 

이 유명한 사건은 기독교,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인식된다. 그에 비해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본문은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당시 이삭의 나이는 몇 살이었을까?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내 사라에게 사실을 말했을까? 사라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사흘길을 걸어 가는 동안 아브라함은 이삭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나중에 사라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자신을 죽이려 고 했던 아버지를 본 이삭의 마음은 어땠을까? 본문은 이런 질문들에 대해 대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유추해 볼 만한 단서조차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이런 간격을 메우려는 시도들이 역사적으로 있어 왔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은 이 본문을 “아케다 (the binding of Isaac)”라고 하면서, 이삭이 스스로를 드리는 믿음의 결단임을 강조하는 쪽으로 이해해 왔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은 본문의 의도에서 벗어난다. 본문은 문학적으로 수많은 간격을 둠으로써 우리에게 상상의 날개를 펴게 해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행할 일에 온전히 초점을 맞추라고 다른 장면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따라서 간격을 메우려는 시도보다는 본문의 주요한 메시지의 흐름을 따라가려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

본문은 처음부터 전체 이야기를 주도하는 주요한 목소리를 먼저 소개한다. 이야기 전체가 하나님의 음성으로 시작되고 끝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삭의 순종이나 아브라함의 믿음 자체보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결과적으로 주시려는 말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하나님은 본문의 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당신의 약속을 확증하신다(17-18절).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거나, 실제 일어날 일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 않도록 이 사건이 하나님의 테스트임을 명백히 밝힌다(1절). 비록 아브라함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은 처음부터 이러한 의도를 알지 못했겠지만, 성경을 읽어가는 독자들은 일의 시작과 끝을 잘 알고 읽도록 안내한다.

창세기 12장에서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도록 명하셨을 때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신다. 12장에서 즉각 순종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아브라함은 즉각 순종한다. 쉽지 않은 결단이다. 이번 명령은 금지옥엽으로 키워온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이다. 차라리 늙은 자기 목숨을 바치라면 쉬울 수 있겠는데 아들의 목숨을 내어 놓으라시니 어찌 쉬운 결단이겠는가! 아브라함의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했겠는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 말없이 새벽 일찍 일어나 즉시 순종한다.

제 삼일에 아브라함 일행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에 이른다. 본문은 언급하지 않지만, 아브라함의 마음은 사흘 동안 더 복잡해졌을 것이다. 5절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순종의 본질은 죽은 자와 같았던 자신의 몸에서 아들을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번제로 드리는 자신의 아들을 다시 살려 주실 것임을 믿었다는 데 있다. 히브리서 11장 17-19절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자신이 이삭을 번제로 드릴지라도 하나님께서 능히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다고 해석한다.

모리아 산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이제 아브라함과 이삭 두 사람만이 힘겹게 모리아 산을 오르고 있다. 번제할 양이 어디 있느냐는 아들의 질문에 아브라함은 간단하게만 대답할 뿐이다. 본문은 이 안타까운 여정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산꼭대기에 올라 아들이 짊어지고 왔던 덤불을 말없이  펼쳐 놓고 이삭을 묶어 제단 위에 둔다. 그리고는 칼을 취하여 아들을 죽이려 한다. 긴장이 극대화되는 순간이지만 이삭의 죽음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아님을 우리는 처음부터 잘 알고 있다. 극적인 순간 하나님의 사자의 목소리가 급하게 아브라함을 막아 세운다. 그리고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선언하신다.

아브라함은 오래 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으나 그 약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여러 번 실수하고 잘못된 길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명확히 이해하고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까지 하나님께 드릴 준비가 되어 있음을 확인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순종이 축복의 조건은 아니다. 그는 15장에서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그의 순종은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야고보서 2:21-24에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뗄 수 없는 하나의 묶음으로 이해하면서, 창세기 15장과 22장을 마치 한 사건인 것처럼 인용하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믿음을 보여준 아브라함에게 최종적인 약속이 주어진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17-18절)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주셨던 사명이요(창세기 12:1-3),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강조해왔던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더 분명하고 더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선포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 한 사람과 그 후손들에게만 복을 주시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 주실 뿐만 아니라, 복이 되도록 부르셨다. 그래서 이 약속에서 아브라함의 “씨”가 크게 번성할 것임을 강조하신다. 심지어 아브라함의 후손이 대적의 문을 취할 것이라는 메시야 축복까지 베푸신다. 그 씨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천하 만민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 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한다. 아브라함의 씨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궁극적으로 성취되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이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사명도 동일하다.

우리는 세상에서 부름을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제 하나님 복의 통로가 되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복을 전하며,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야 한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굳건한 믿음과 순종을 통해 이 위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불러 복 주신 이유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 심기워져서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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