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야고보서 4:8-10).

한국 기독교의 비극

‘만약 세상이 제 정신이라면, 예수님은 완전히 미친 사람이고 최후의 만찬은 소꿉놀이에 불과할 것이다. 세상은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말하고 예수님은 "남의 일 같은 건 전혀 없다."고 말씀하신다. 세상은 "가장 현명한 노선을 따라가 성공하라."고 말하고, 예수님은 "나를 따르고 십자가에 못 박히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은 "운전 조심! 자기 목숨은 자기가 챙겨야 한다고."고 말하고,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은 '받으라'고 말하고 예수님은 '주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의 판단 기준으로 보면 예수님은 완전히 미쳤고, 어느 정도 미치지 않고도 그분을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십자가 아래가 아니라 환상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다."는 바울의 말은 믿음의 고백이다. 결국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예수님의 광기가 세상의 냉혹한 제정신보다 더 온전하다는 믿음 말이다.’

프레드릭 뷰크너가 그의 책 『예수님의 얼굴』에서 한 말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은 뷰크너가 말하는 상황과는 많이 다릅니다.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은 온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도덕군자입니다. 그분은 좋은 것만 생각하고, 좋은 것만 말하고 절대로 부정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고 특히 다른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비판하지 않는 분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를 사랑하시지만 사회구조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크고 화려한 성전을 좋아하시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를 더 많이 사랑하십니다. 노골적으로 드러내긴 뭐하지만 안락한 삶을 투자한 만큼 공정하게 대가로 주시는 분입니다. 특히 약속을 엄격히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에 한 번 구원하시면 절대로 번복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믿을 만한 분입니다. 사람들은 수시로 배반을 일삼지만 그분은 결코 배반하지 않으시는 분이기에 평생을 의탁해도 손해날 것이 없는 분입니다. 특히 죽은 후에는 더 크고 아름다운 것들로 넘치는 천국을 준비해 놓으셨기 때문에 세상에서 조금 미비한 부분이 있어도 그냥 감사하며 살 수 있게 해주시는 영원하신 주님입니다.

한국 기독교의 비극은 아무도 예수님이 미쳤다고 말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담겨 있는 급진적인 요구들을 지우고 현실의 요구에 부응하는 종교를 만들어냈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잃는 사람이 없는데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현상을 야고보 사도는 '두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두 마음을 가지라고 오늘도 사단은 속삭입니다. 인간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결코 하나님을 대적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택하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프레드릭 뷰크너의 말대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예수님의 광기가 세상의 냉혹한 제정신보다 더 온전합니다.

두 마음의 치유

세상의 유혹을 받아 우리의 마음이 나뉘려고 할 때, 혹은 이미 '두 마음'이 되어 그 쪼개어진 마음으로 고통당할 때, 어떻게 하나로 묶어 온전한 심령이 될 수 있을까요?

야고보 사도는 첫 번째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처방을 제시합니다. 서로 다투고 욕심을 내고 살인하고 시기하는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두신 '살았고 영영히 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거나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받아 탕진하고, 돼지우리에서 아버지의 집을 떠올리는 탕자의 비유와 같습니다. 일어나 고향을 향해 걷기 시작합니다. 거짓되고 허망한 종교생활을 버리기로 작정합니다. 이기적인 기도를 버리고, 주님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분변하고 거기에 따라 기도합니다. 자신의 부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기도입니다. 결정권을 그분께 내어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됩니다. 그분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눈동자와 같이 입 안의 혀와 같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죄에서 손을 털 수 있습니다. 손을 씻는다는 것은 제의적인 표현입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소 앞에 나아갈 때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례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면 죄인인 우리들은 손을 씻어 우리를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손을 씻을 때 우리는 성결하게 되고 나뉘었던 두 마음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완세론(完世論)적인 삶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손을 씻고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말한 다음, 9절에선 슬퍼하며 애통하고 울라고 합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고 합니다. 야고보 사도의 이러한 요구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세속적인 욕망에서 비롯되는 웃음과 즐거움은 그 끝이 허망하다는 사실입니다.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을 통해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야고보 사도는 종말론적인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종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말이라는 단어가 자주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지구 멸망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과 다릅니다. 언젠가 마지막 날이 옵니다. 그날은 지구 최후의 날이 아니라 세상이 완성 되는 날입니다. 하늘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완전한 세상이 이루어지는 날이요 타락한 창조세계가 회복되어 마침내 창조가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종말 대신에 '완세'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구원 받았습니다.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새롭게 사용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삶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정의를 위한 삶이며, 다른 이들을 위한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사라진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학정에 고통 받는 이스라엘의 신음소리를 들으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 역시 이웃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애통하는 자, 슬퍼하며 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슬픔, 울음과 애통함은 영원히 땅에 떨어지지 않는 하늘에 쌓는 보화가 될 것입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야고보 사도는 마지막 권면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낮추라는(타페이노쎄테) 것입니다. 주 앞에서 우리를 낮출 때 심령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온유함이 회복되고, 하나님께서 나뉜 두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십니다. 세상을 향하던 마음이, 변할 것 같지 않던 정욕이 하나님의 사랑에 녹아 하나님을 향하는 사랑으로 승화됩니다. 그분의 마음처럼 우리의 마음도 온전한 마음, 으로 회복됩니다.

낮아지는 것이 하나 되게 하는 비결입니다. 온유함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나뉜 두 마음이 다시 합해집니다. 세상은 멀어지고, 내 안에서 솟아나는 말씀의 뜨거운 생명과 위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가 만나 우리의 심령이 들끓게 됩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우리의 그분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만납니다. 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분과 우리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낮아질 때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우리가 죽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십니다.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우리는 그분처럼 높아집니다. 그러나 스스로 높아지려 하면 자신의 정욕에 속고, 세상에 속고, 마귀에게 속습니다. 세상과 짝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윌리엄 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일에 성공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잃는다. 또 어떤 사람은 고난과 실망만 겪는다. 그러나 그로 인해 온 세상보다 더 귀한 것을 얻는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상향이 아니라 하향의 길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그 길을 내려가고 또 내려갈 때 우리는 주님과 만나 하나가 되고, 시나브로 상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주님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시는 유일한 길입니다. 끝까지 그 길을 걷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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