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평창에서 동계올림픽 경기가 새해 2월 9일에 개막된다. 두 해 전 평창 일대를 돌아보는 기회가 있었는데 여러 가지 시설공사가 한창 바쁘게 진행 중이었다. 이런 세계적 행사로 인하여 강원도가 시골티를 말끔히 벗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한국의 마지막 청정지역이 문명 찌꺼기의 오염지대로 전락할 우려도 없지 않다.

강원도라면 흔히 예수님께서 걸어 다니셨던 땅의 길이와 넓이로 이해된다. 이스라엘 남쪽 브엘세바에서 북쪽 단까지의 거리가 강원도 남북의 길이와 대강 비슷하다. 2천여 년 전에 이 땅 위에 이민 오신 예수님께서는 강원도 밖을 나가시지 못한 셈이다. 아기 때에 이집트에 다녀오신 것을 빼고는 말이다.

예수님은 실상 이민 첫 세대이셨다. 하늘나라에서 이 땅 위에 이민 오셨는데 그 과정이 무척 거칠었다. 태어나자마자 하마터면 헤롯왕의 칼끝에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지구 이민 생활은 탄생 때부터 십자가 처형되실 때까지 살벌한 위협과 처절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툭하면 죽이려 들었다.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라”(요 7:1).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요 7:19)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막 3:6) 이런 말씀들이 복음서에 자주 나오지 않던가. 하나님은 어찌하여 그 유일하신 아들 예수님을 그토록 위험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던져버리셨을까?

예수님께서 지금 시대에 이 세상으로 이민 오셨다고 상상해 보라. 목회하시기에 얼마나 더 좋은 여건이 될까. 이스라엘의 지형도 높은 산이 많다는 점에서는 강원도 땅 비슷하다. 그런데 지금은 고속도로가 발달해서 자동차 타고 사통오달 편리하게 다니실 수 있다. 마이크 장치가 썩 잘 되어 있고, 신문잡지 같은 인쇄 매체, 라디오 같은 전파 매체, 텔레비전 같은 영상매체, 컴퓨터, 핸드폰 등의 대량공급 매체들을 통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이 배달될 터다.

우리는 그 이유를 자세히는 모른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이민 오신 것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깝기 때문”이라고 했다(막 1:15). 하나님께서 신중하게 계획하셔서 가장 적합한 때에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이민 오셨다는 뜻이다. 사람의 계산법으로는 ‘지금이 바로 그때’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때는 그것과 전혀 다를 수 있다.

미주 한인교회들이 늙어가고 있다. 폭삭폭삭 늙어가고 있다. 한인 이민자들이 대폭 줄고 있고 2세대들과 미국 주류교회의 열기가 크게 떨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낙담만 할 일만은 아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줄곧 초승달에서 보름달, 보름달에서 그믐달, 다시 그믐달이 초승달이 되어 왔다. 성삼위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글로벌 시대에 이민 오신 예수님을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으로 모시느냐에 달려 있다. 그분이 지셨던 그 십자가를 다시 지고 강원도를 향해 출발하자는 뜻이다. (대표 저서: 목회자의 최고표준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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