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십계명 묵상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동안 십계명의 말씀에서 자유를 향한 초대를 함께 묵상했습니다. 십계명은 단순히 무언가를 하지 말라는 족쇄가 아니라,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자유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축복입니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남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입니다(출 20:17). 어쩌면 이 계명은 여덟 번째 계명인 “도둑질하지 말라”가 중복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계명이 강조하는 것은 “소유에 대한 탐심”입니다. 마음 속에 불 일듯이 일어나는 탐욕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라는 계명입니다.

 

만족하는 마음

마지막 계명에서 주시는 말씀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족, 곧 만족하는 마음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불안을 느낍니다. 김용규 교수는 십계명에 대한 책 『데칼로그』에서 “인간은 탐욕에서 오는 불안 때문에 더욱 탐욕에 매달리는 아이러니한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이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듭니다. 탐욕 때문에 불안을 경험하면 그 원인이 되는 탐욕을 다스려야하는데, 우리는 오히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더욱 탐욕에 매달리는 아이러니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없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수도원에 가서 며칠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수도사가 방으로 안내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그것 없이 사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것에 집착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없어도 살 수 있는 것에 대한 집착이 깊어지면 이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나에게 없는 것 때문에 상대적인 불행을 느낍니다. 마지막 계명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탐심으로부터의 자유를 촉구합니다. 김용규 교수는 오늘의 계명을 이렇게 바꾸어 말합니다. “너는 네게 있는 것에 만족하고, 네게 없는 것을 탐하지 말라.” 있는 것에 만족하고 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을 때, 우리는 불안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소유를 넘어서라

마지막 계명이 가르쳐 주는 또 다른 말씀은 “소유를 넘어서라”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삶, 인생의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소유를 넘어서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소유에 대한 집착은 우리를 얼마나 불행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김겸섭 목사의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는 책에 하얀 코끼리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고대 태국 왕궁의 왕실 문서실에는 하얀 코끼리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나 국왕은 오늘 그대에게 이 성스러운 하얀 코끼리를 하사하오. 향후 5년간 잘 돌보다가 내게 다시 돌려 주길 바라오.” 얼핏 보면 국왕이 신하에게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는 것처럼 보이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하얀 코끼리를 신하에게 내리는 것은 왕권을 위협하는 신하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입니다. 하얀 코끼리는 태국에서 신성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하얀 코끼리는 국왕이 아니면 소유할 수 없는 성스러운 동물이었습니다. 이런 하얀 코끼리를 신하가 소유한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과 명예를 누리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런데 하얀 코끼리를 소유하는 순간, 이것이 기쁨이 아니라 재앙임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하얀 코끼리 한 마리가 하루에 먹어치우는 양식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의 경제력으로 이 하얀 코끼리를 돌보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합니다. 결국 그 신하는 하얀 코끼리를 돌보다가 몇 개월만에 파산해버립니다. 이로써 국왕은 반역을 도모할 수 있는 신하를 효과적으로 제거해 버립니다.

하얀 코끼리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소유하고 싶고, 성취하고 싶은 어떤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하얀 코끼리를 얻고자 노력하지만, 막상 우리가 얻은 하얀 코끼리가 우리를 옴짝달싹 옭아매는 족쇄가 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오늘 십계명의 말씀은 소유를 향해 집착하는 우리에게 그것으로부터 자유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초대합니다.

닐 라슨 스티븐스 작, 예수께서 삭개오를 부르심

소유를 넘어 나눔으로

그런데 “소유를 넘어서라”는 말씀은 모든 소유를 포기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이 땅에서 소유를 누리며 살아가되, 소유를 넘어서는 자유로 나아가라고 초대하는 말씀입니다. 소유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소유를 넘어서 나눔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소유가 우리를 삼켜버리는 하얀 코끼리가 되지 않도록, 또한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소유를 넘어서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소유를 통해 나눔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갈 때에 가능해집니다.

자동차 회사 포드(Ford)의 창업자인 헨리 포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헨리 포드는 엄청난 재산을 소유한 사람이었지만, 절약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양말을 더 이상 꿰맬 수 없을 때까지 신었는데, 아내가 가게에서 새 양말을 사올까 두려워 자동차 안에서 낡은 양말을 갈아 신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포드가 많이 가졌어도 삶의 기쁨이 없었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포드 본인이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만끽하며 살아간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소유하는 것 자체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달콤한 즐거움이었기 때문입니다. 소유하는 것이 삶의 기쁨이 된 사람은 비록 자동차 안에서 꿰맨 양말을 갈아신는 삶을 살아도 자기의 소유가 늘어가는 것에서 큰 기쁨과 즐거움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엄청난 재산을 가진 사람이 자동차에서 꿰맨 양말을 갈아신으며, 자신의 소유가 늘어가는 기쁨만 누렸다는 것이 얼마나 안쓰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내가 가진 소유를 움켜쥔 채 그 안에서 기뻐하며 살아가는 모습, 이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삶의 행복은 소유를 넘어 나눔으로 나아갈 때에 이루어집니다. 삭개오가 삶의 행복을 발견했던 순간은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소유를 나누기로 결심한 순간입니다(눅 19:6-8). 내가 움켜쥔 손을 펼칠 때 우리는 자유를 경험합니다.

소유를 넘어 존재로

“소유를 넘어서라”는 말씀의 두 번째 의미는 소유가 아니라 존재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소유에서 찾는 사람들은 가진 것을 빼앗기는 고난 앞에서 철저하게 무너집니다. 삶의 행복을 소유에서 발견하고자 했던 사람은 어느 순간 움켜쥔 것이 손 안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낭패감에 시달립니다. 삶의 기반을 소유 위에 놓았던 사람들은 소유를 빼앗기는 고난 앞에서 삶이 온통 흔들립니다.

하지만 인생의 행복을 소유를 넘어 존재에서 찾고자 하는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터전을 붙잡게 됩니다. 소유를 넘어 존재로 나아간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나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분입니다. 소유를 넘어 존재로 나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붙잡는다는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삶의 터전을 붙들고,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참 행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소유냐 하나님이냐 선택하라”(마 6:24)고 초대하신 이유입니다. 십계명 묵상을 마치면서 그동안 십계명이 가르쳐 준 참 자유를 누리는 기쁨이 모두의 삶에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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