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아버지

우리말로 주기도문의 첫 부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에선 그 순서가 반대입니다. '파테르(아버지), 헤몬(우리), 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하늘에 계신)'입니다. 즉 주기도문의 첫 단어는 아버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라는 사실을 믿고 있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아버지시라면 어떤 문제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삶뿐만 아니라 죽음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만유의 주인이시요, 창조주이신 그분이 진정 나의 아버지라고 믿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의 신들은 인간에게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신을 달래기 위해 다른 종교의 신자들은 신의 분노를 달래고 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 수식어를 달아야 했습니다. 중언부언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마 6: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이스라엘은 복잡하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시편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을 부르는 단어들은 간략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여호와여",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왕이신 나의 하나님" 정도였습니다.

새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들은 옛 이스라엘 백성보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도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부르지 못하고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세 번 하늘을 쳐다보면 목욕을 하고 와야 했습니다.

이렇듯 범접하기 어려웠던 하나님을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도 모자라서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바라는 히브리말은 우리말로 아빠입니다.

우리의 정체성

주기도문의 아버지라는 호칭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보여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 1:12) 이 권세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권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할 때마다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실제로는 그분이 아버지이신 것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첫 단어인 아버지를 통해 가장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버지 혹은 아바라 부르며 달려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 앞에 나아가 모든 것을 드러내기를 꺼립니다. 자신의 참 자아를 마주하기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실상을 피해 달아나거나 거짓 자아를 만들어 낸다. 거짓 자아는 훌륭하고 꽤 매력 있고 피상적으로 행복하다. 우리는 자신이 알거나 느끼고 있는 자아(남들이 받아 주거나 사랑해 주지 않을 것 같은)를 그보다 무난할 듯한 다른 모습 속에 감춘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예쁜 가면을 쓰고 그 뒤에 숨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자신이 숨어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예쁜 가면이 자신의 참 모습인 줄 착각한다."(사이먼 커그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참 자아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던 것처럼 우리도 부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거짓 자아

“세월이 갈수록 우리 삶의 최대의 덫은 성공이나 인기나 권력이 아니라 자기 거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성공과 인기와 권력도 큰 유혹이 될 수 있으나 그 유혹의 힘은 자기 거부라는 훨씬 큰 유혹의 일부로써 발휘될 때가 많다. 자신이 사랑받지 못할 쓸모없는 존재라는 음성을 우리가 믿을 때 성공과 인기와 권력은 그만큼 매력 있는 대안으로 다가오기 쉽다. 하지만 진짜 덫은 자기 거부이다. 거부당하거나 혼자 남을 때, 그 즉시 떠오르는 생각은 이것이다. ‘거 봐. 내가 못난이라는 것이 다시 한 번 입증됐잖아.’(내 안의 어두운 부분이 말한다.) 나는 하등 쓸모없는 자다. 나는 옆으로 밀려나 잊히고 거부당하고 버림받아 마땅한 존재다. 자기 거부는 영적 삶의 최대 적이다. 우리를 '사랑받는 자'라 부르시는 거룩한 음성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사랑받는 자라는 사실이야말로 우리 존재의 핵심 진리다.”(헨리 나우엔).

헨리 나우웬의 말대로 우리 삶의 최대의 덫은 자기 거부입니다. 자기 거부는 가장 큰 영적 장애물입니다. 그것은 거짓 자아를 만들고 거기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거짓 자아는 수용과 인정에 집착하도록 합니다. 남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예 혹은 아니오를 당당하게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정직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완벽한 이미지를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커집니다. 거짓 자아는 외부의 체험과 성취에 매달립니다. 중요한 존재라는 느낌을 얻기 위해 무언가에 탐닉합니다.

거짓 자아는 우리를 눈멀게 해서 빛도 내면에 있는 어두움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진리 없는 삶을 진리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거짓 자아는 대인관계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 듭니다. 그래서 거짓 자아는 유력한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어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은 눈에 들어올 리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심령의 가장 깊은 열망은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분을 더 분명히 보고 그분을 더 깊이 사랑하고, 그분을 더 가까이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심령은 그분 안에서 쉼을 얻기까지는 늘 불안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짓 자아를 발견하여 그것과 대면하는 용기를 가질 때 우리는 거짓 자아를 물리치고 참 자아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신의 초라하고 깨어진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거짓 자아가 바로 자신의 죄성임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의 거짓 자아는 움칠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 자아의 아버지는 사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짓 자아를 무너뜨리기 위해선 하나님을 진정한 아버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짓 자아를 불식시키는 능력의 기도가 바로 아버지라는 이 호칭에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 받는 자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16). 사랑받는 자가 우리의 정체요 실존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이름이요 우리와 맺으시는 관계의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인 모두가 '사랑 받는 자'라는 고유의 정체성으로 인해 세상과는 다른 가치관을 보여 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명예를 추구하고, 계급과 서열로 지위의 허상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이 엘리트 집단에 속하기 때문에 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때문에 귀하다는 교훈을 망각한다면 그 교회는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모두가 형제요 자매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아버지의 사랑 받는 자입니다. 나 자신이 사랑받는 자임을 느끼지 못하면 타인의 성스러움도 느낄 수 없습니다. 나 자신과 소원한 사이라면 다른 이들에게도 나는 이방인입니다. 타인에 대한 의존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받아들일 때 나는 더 이타적으로 사랑하며 더 긍휼이 많아지고 나 자신에 대해서 덜 심각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매순간 우리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주시는데도, 우리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안간힘을 다합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되고, 세상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세상의 꽁무니를 좇는 제자가 되고 기쁨이 없는 떨떠름한 성도가 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주기도문의 시작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도구입니다. 허상을 깨고 참된 진리의 삶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는 영적인 삶으로의 진입입니다. "그대의 모든 기대가 좌절되게 하고 그대의 모든 계획이 좌초되게 하고 그대의 모든 갈망이 시들어 무(無)가 되게 하라. 그럴 때 그대는 어린아이의 무력함과 가난함을 체험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노래하고 춤출 수 있으리라."(래리 헤인)

우리가 하나님을 참되고 진실한 마음으로 아버지라고 부를 때 우리는 바로 그곳,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에는 우리를 영적인 삶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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