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교회나 다 그렇겠지만 우리 교회도 해마다 새해가 되면 새로운 성경 구절 하나를 택해서 한 해의 말씀으로 삼고 그렇게 살기를 원하고 다짐한다. 금년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니라”는 말씀이다. 성경의 말씀을 다 좋아하지만 유난히 애착이 가는 귀한 말씀이다. 세상의 모든 교회가 작은 자 돌보기에 전력을 다한다면, 다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열 배 아니 백 배는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큰 자 올려보기를 더 선호하거나 작은 자 내치기를 더 좋아한다. 전자를 옛말로 알랑방구라고 했으며, 후자는 요즘 말로 갑질이라고 한다. 그걸 나는 전자는 겉보기고, 후자는 속보기라고 말하고 싶다. 남보기와 내보기라고 말하고도 싶다. 남보기는 남에게 보이기고, 내보기는 나만 보기다. 왜 이렇게 말을 하는가 하면, 겉보기는 마음은 없는데 그저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거짓된 행동일 뿐이고, 속보기는 몸과 마음, 정성을 다한 진실된 행동 즉 나만을 향한 정직이기 때문이다.

겉보기, 즉 큰 자에게 행동으로 적절하게 아부를 잘하면 출세길이 열린다. 작은 자를 온 몸과 마음, 정성을 다하여 돌보면 출세는 커녕 금전적인 손해는 필수요, 유유상종이라고 비난을 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는 어불성설이다. 작은 자에게 지극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비난하는 사람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로, 이는 오직 하나님께 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야 큰 사람이 되려고 큰 사람들에게 아부하는 것이 일상이고, 큰 사람이 되어 작은 자에게 갑질하는 것이 일상일 수 있겠지만, 하나님을 아는 우리들이야 이런 일상과는 전혀 친근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하니, 조금 과격한 듯 싶지만, 좌우지간 우리도 그렇긴 하다.

 

빛과 소금으로 살라고 했다고 세상의 빛이 될 생각은 없고, 주로 교회에서 빛이 되려고 안달하고 있다. 소금은 건강에 해로운 것이라며 추호도 소금이 될 생각은 없다.

얼마 전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고 있는데, 차 한 대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운전자가 차문을 열고 금빛이 선명한 반지를 내밀며 개스비가 없으니 그 반지를 오십불에 살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뒷자리에 네댓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애절한 눈빛으로 제발 좀 하는 데 마음이 움직였으나, 주머니에 현찰을 그렇게 많이 갖고 다니지 않아서 반지를 사줄 수는 없고, 대신 내 카드로 기름을 가득 넣어 줄 수는 있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계속 현금이 필요하다고 했다. 순간 의심스런 생각이 들었으나 작은 아이의 눈빛이 너무 애처로워 지갑에 있던 13불을 꺼내 전부 다 주었다. 집에 돌아와 이 이야기를 아내에게 했더니 겨우 13불 갖고 네 식구가 밥 한 끼나 제대로 먹겠느냐고 하며, 자동현금 인출기에 가서라도 돈을 찾아서 좀 더 푸짐하게 건네지 그랬느냐고 했다. 자꾸 현금만 달래는 것이  의심스러워서 그럴 수 없었다고 했더니, 의심은 무슨 의심, 갓난 아이와 네댓 살 아이를 데리고 마약을 하겠냐, 술을 사서 마시겠느냐고 하며 핀잔을 줬다. 내 주머니의 전 재산을 내어 주고도 아내에게 핀잔을 들으니 서운했다.

그리고 마지막 말에는 서글프기까지 했다. 사랑을 하려면 의심없이 다 주어야지 그렇게 늘 마음에 의심이 있으니까 겨우 하나 있는 마누라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거 아니냐고 하는데 서글픔을 넘어 눈물이 핑 돌았다. 핀잔을 들어 서글픈 것이 아니라 내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걸 몰라 주니 그런 것이다.

역시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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