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26).

이사야 선지자는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우주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놀라운 권세와 능력을 찬양하였습니다. 오늘날 밝혀진 과학 지식들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놀람을 넘어 압도당해야 합니다.

지구의 축이 23.5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계절의 변화가 생깁니다. 만일 기울지 않았다면 대양에서 수증기가 남북으로 이동해 거대한 얼음 대륙을 쌓아 올렸을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또 달이 지구로부터 40만 킬로미터보다 더 가까이 있었다면 조류의 규모가 커져서 대륙이 전부 물에 잠기고 산들도 침식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더 멀리 떨어져 있다면 바닷물이 뒤섞이지 못해 썩었을 것입니다. 지각의 두께가 지금보다 더 얇았다면 산소가 사라져 모든 생명체가 죽었을 것이고, 대양의 깊이가 몇 미터만 더 깊었다면 이산화탄소와 산소가 흡수되어 모든 식물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지구의 무게는 6섹스틸리언(6곱하기 십의 21승) 톤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지구는 그 축을 중심으로 균형을 잡아 회전합니다. 지구는 1시간에 1,60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 즉 하루에 4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회전합니다. 이것을 1년으로 환산하면, 1.440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회전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무게의 지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축을 중심으로 이토록 무서운 속도로 돌아가는데, 중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에 매달려 제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연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구를 벗어나면 좀 더 확실해집니다. 태양계에는 9개의 행성이 있는데 태양과 가장 가까이 있는 행성인 수성은 5,700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가장 멀리 있는 명왕성은 약 58억 6,240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이 행성들이 궤도를 따라 한 치의 오차 없이 태양의 둘레를 돕니다. 수성은 88일 만에 한 번 공전하고 명왕성은 248년에 한 번 공전합니다. 태양은 은하계를 이루고 있는 1,000억 개의 불타는 별들 가운데 한 개의 작은 항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은하계가 수없이 많은 곳이 바로 우리가 바라보는 우주입니다.

광대한 우주를 만드신 분이 바로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입니다. 이토록 어마어마한 분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그래서 아버지라고 느끼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여기시고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신비입니다. 신앙은 신비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아버지로 시작하는 것은 기도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기도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로 느껴질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로 느껴지는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목표이자 삶이 변화되는 시점입니다.

자비하신 아버지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 주는 가장 극적인 비유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자의 연은 이미 끊어져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자기 마음대로 될 줄 알았다가 짐승보다 못한 처지가 되어서야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굶주림이라도 면하기 위해, 아들로서가 아니라 아버지 집의 품꾼이 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이 가까워졌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아버지가 달려오십니다. 날마다 높은 곳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에 아들의 모습이 들어온 것입니다. 아들을 보자마자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뛰어갑니다.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 15:21-23).

아들이 아들 됨은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마음을 거스르며 살아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해드릴 수 있는 일은 아들로 있는 것뿐임을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날려 버린 재산이 아니라 깨어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 회복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아버지는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잃었던 아들을 찾은 기쁨에 가장 좋은 선물을 베풉니다. 아들을 영예롭게 만들고 아들의 지위를 복권시킵니다.

돌아온 탕자에게 그러셨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죄로 물든 과거를 없애 주시고, 생기 있는 삶을 주십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새로운 삶과 힘을 주십니다.

참된 희망

그것이 바로 참된 희망입니다. 죄인에게도, 창녀에게도, 도둑에게도, 알코올 중독자에게도 심지어 살인범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 누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에서 제외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지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운명하셨습니다. 그분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희망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권위와 지배를 상징하는 반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고대 여러 나라에서 반지는 고귀한 신분을 상징했습니다. 아버지가 여전히 아들을 신뢰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신발은 아들의 지위를 드러냅니다. 맨발은 노예와 가난을 상징하는 반면, 신발은 자유와 부를 상징합니다. 이 귀한 선물들을 통해 아버지는 자신과 아들 사이에 온전한 화해가 이루어졌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줍니다.

아버지의 선물은 옷, 반지, 신발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잃었던 아들을 찾은 아버지는 너무 기뻐서 잔치를 벌입니다. 아버지는 하인들에게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명합니다. 염소나 양이 아닌 송아지를 잡게 했다는 것은 온 마을 사람들을 다 불러서 잔치를 열겠다는 의미입니다.

님의 사랑은 불이어라!

아버지의 환대와 자비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수준이었습니다. 작은 아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처음에는 좌불안석이었을 것입니다. 욕이라도 하고 때리기라도 했으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바라보며 작은 아들의 마음은 녹아내리고 마침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위대한 신앙인들은 말했습니다. "님의 사랑은 불이어라!" 모든 것을 녹여 버리는 사랑의 용광로,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자비를 알게 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전환점입니다. 그 사랑을 알면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에는 바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우리 기도의 목표가 됩니다.

그분을 사랑하는가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이 말씀에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사랑이 연약한 너를 만지고, 해방하고, 네게 힘을 주도록 허락하겠느냐?" 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분의 사랑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은혜의 복음을 선포할 때 자신의 연약함을 말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전했습니다. 그것이 당시 로마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자비를 얼마나 깨닫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기도의 목표

기도는 하나님이 정말 우리 아버지시구나! 라고 느껴질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감동시켜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기도는 완성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때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에 감동해 하나님이 아버지로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이 기도가 진정으로 응답되는 때입니다.

아버지는 모든 기도의 목표입니다. 그분이 아버지로 느껴지는 순간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에 임하면서 굳건한 신앙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분에 대한 신뢰 속에서 "아버지여, 아버지의 뜻이 제게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반응하는 존재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곳에 내 뜻은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관철하기 위해 떼를 쓸 수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는 삶이 존재할 뿐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던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이제 주님의 사랑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사랑으로 세상과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기도의 완성은 아버지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자녀로 불러주시고 그분의 사랑에 반응하는 존재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아버지! 이 기막힌 호칭에 담겨 있는 사랑의 의미를 깨닫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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