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하나 됨

복음의 완성은 '하나 됨'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에베소서 1장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7-10).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 인간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곧 복음의 완성이요. 우리가 드리는 주기도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여러 번 '우리'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반역한 인간이 잃은 것은 하나님과 에덴동산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잃은 것은 바로 공동체였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게 된 인간들이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과 악을 가리기 시작하게 된 인간은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기 위해 힘이라는 도구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애초에 의도하신 창조의 원형은 힘을 사용하는 경쟁과 대결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돕는 존재, 즉 섬김의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하와를 바라보며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선악과를 따먹고 서로가 분리되기 전, 아담과 하와가 경험한 것은 일체감이었습니다. 분명 '나' 아닌 '남'이었지만 놀랍게도 '나'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그것을 깨닫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행복과 기쁨의 표현이었습니다.

인간은 '우리'로 존재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되어야 할 그들이 '나'들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관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잃은 것은 공동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공동체 안에 존재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갈라져 버린 인간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공동체의 대안을 마련하였습니다. 인간 사회입니다. 그 과정을 잘 보여 주는 사람이 바로 가인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쫓겨난 후 에녹 성을 지었습니다.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 사는 사람과 밖에 사는 사람을 구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가족과 씨족과 부족과 국가 등이 바로 그러한 공동체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화합의 공동체가 아니라 갈등의 공동체였습니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돌보심과 공급이 사라졌기에 한정된 자원을 확보하려는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힘센 자는 더 많이 가질 수 있었지만 힘이 약한 자들은 굶주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상태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 사회는 근본적으로 누군가는 희생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희생의 구조, 그것은 하나님 없이 인간의 힘으로 유지되는 공동체의 필연적인 특성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인간들이 어떠한 공동체를 건설하건 그것은 완벽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이 '나'로 존재하는 한 극복될 수 없는 한계입니다. '너'와 '나'가 따로 존재하는 한 '우리'가 될 수 없으며, 창조의 본래 모습인 '우리'가 되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너'와 '나'가 따로 없이 '우리'가 되는 나라입니다.

제자 공동체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실패란 없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창조의 변형을 초래하여 불완전해졌지만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십니다. 모든 것을 선의 도구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에는 어떠한 제한도 있을 수 없습니다. 창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회복될 것이며 또한 새롭게 완성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 또한 회복될 뿐 아니라 더 큰 선의 도구로 이용될 것입니다. 이미 그 회복은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우리'가 됨으로써 드러났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날 하나님의 창조 역시 완성될 것입니다.

창조 때의 완벽했던 공동체의 가능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다시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족인 제자공동체입니다. 하나님 나라인 교회입니다. 반역하여 타락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타락하기 전과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으로 완전한 공동체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혀 주신 것입니다. 그로써 반역한 인간들이 다시 공동체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경쟁과 힘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그것은 여전히 이루기 어려운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을 덧입은 초대교회의 제자들은 그것을 실현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함께 모여 유무상통하는 초대교회입니다. 진정한 교제와 나눔과 소통인 코이노니아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게 합니다. 물론 옛 습성의 지배를 받는 제자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방법은 바로 ‘콤무니오’(상통)입니다. 서로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사용된 ‘서로’라는 단어, ‘알렐론’입니다.

성령 충만했던 초대교회의 제자들은 그것을 실제로 이루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 되어 형제자매로 한 식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룬 성령공동체의 모습은 복음을 복음 되게 하는 진정한 표지입니다.

조직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기간은 오래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교회는 ‘콤무니오’ 곧 상통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서로가 상통하며 함께하는 관계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시공동체라 부르는 초대교회 이후 그것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교회 속으로 다시 ‘경쟁’이라는 세상의 방식이 들어오고, 힘으로 지배하고 다스리는 세상의 방식이 교회를 유지하는 방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서로’라는 방식을 통해 유지되던 하나님 나라의 관계는 힘을 잃고 힘의 지배에 의한 조직으로서의 교회가 등장했습니다.

4세기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주어진 종교의 자유는 기독교를 박해로부터 해방시켰지만, 실제로 교회에 들어온 것은 자유가 아니라 힘과 경쟁이라는 타락한 인간의 방식이었습니다. 그 이후 주류 교회는 한 번도 힘과 경쟁의 방식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애용되는 단어 중 하나가 '카리스마'입니다. '카리스마'는 은사라는 본래의 뜻에서 벗어나 '회중을 지배하는 힘'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목회자에게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으로 통치하고 지배하는 방식만이 교회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가 세상보다 더 큰 힘으로 지배하고 다스리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상처를 입고 방황합니다. 목사나 지도자들의 잘못이나 미성숙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힘을 사용하는 곳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방식은 반드시 약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유지되기 마련입니다. 교회 또한 세상의 방식을 따른다면 똑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잘 들여다보십시오. 모든 것이 전문화되었습니다. 설교자는 물론 모든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 다 전문가들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현상이 잘못이라는 걸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알아야만 합니다. 교회는 강자들의 각축장이나 공연장이 되어선 안 됩니다. 교회는 오히려 약자들이 보호받고 약자들의 불완전함과 모자람이 서로를 묶어 주는 끈이 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능력 있는 자와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효율적으로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반대로 종이 되어 소자들을 섬기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강자와 약자의 경계가 무너지고 모두가 하나 된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때 교회는 참된 교회가 되고, 진정한 공동체가 되고,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

성령공동체를 이루었던 초대교회는 능력 있는 전문가들의 각축장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참여하고 서로 사랑하는 모임이었습니다. 모든 일에 서로가 함께 하였습니다. 잘하고 못하고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효율과 관계 없는 곳입니다. 완벽한 하나님께서 왕이시고 아버지이시기에 부족함이나 결핍이 발생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가 하나 되어 서로 함께하는 사회를 이루었습니다. 먼저 ‘서로’라는 단어가 성경에 얼마나 많이 언급되고 있는가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서로 우애하고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며(롬 12:10) /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합심하며)(롬 12:10) / 너희도 서로 받으라(서로 받아들이십시오)(롬 15:7) /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서로 충고하십시오)(롬 15:14) / 너희가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롬 16:16) / 서로 기다리라(고전 11:33) /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서로를 위하여 같이 걱정하십시오)(고전 12:25) / 서로 종노릇 하라(서로 사랑으로 섬기십시오)(갈 5:13) /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갈 6:2) /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서로 위로하십시오 서로 건설하십시오(build each other up)(살전 5:11) / 너희끼리 화목하라(서로 화목하게 지내십시오)(살전 5:13) /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서로 선을 행하십시오)(살전 5:15) / 서로 용납하고(서로 사랑으로 참아주십시오)(엡 4:2) /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서로 친절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엡 4:32) / 피차 복종하라(서로 순종하십시오)(엡 5:21) / 피차 용서하라(서로 용서하라)(골 3:13) /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서로 죄를 고백하십시오)(약 5:16) / 서로 기도하라(서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약 5:16) /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서로 진심으로 다정하게 지내십시오)(벧전 1:22) /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고(서로 대접하십시오)(벧전 4:9) /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서로 겸손하게 대하십시오)(벧전 5:5) / 서로 사귐이 있고(서로 친교를 나누십시오)(요일 1:7)

위에 열거한 구절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신약 성경의 훈계에는 상호 협동의 언어구조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중 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가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살전 5:10-11).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과 함께 살게 하시려는 것이 주님의 의도이므로, 우리는 서로 위로하고 서로 덕을 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일을 주님께서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론에서 상호 협동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피차 덕을 세우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build each other up"이라 번역되어 있습니다. 서로를 건설한다는 말은 곧 당시의 지역 공동체였던 교회를 염두에 두고 사용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건설한다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으므로 이제 우리는 교회 세우는 일을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세운다.’ ‘건설한다’는 대상은 영적으로 성숙해야 할 개인이 아니라(덕이 아니라) 교회입니다. 교회의 창설과 보존, 발전과 실현을 가리켜 사도 바울은 ‘세운다’(오이코도메인)는 말로 나타낸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을 대신하여 서로 협력하여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혼자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공동체를 세울 권한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건설에 모두가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상호 책임은 사도 바울의 여러 편지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서신서들의 끝부분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의식적으로 그리스도인 동료들을 소개하고 안부를 전합니다.

그가 말하는 많은 부분들에 '서로'의 신학이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배가 그러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 여기서도 덕을 세우는 것은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은 "for strengthening of the church"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공동체의 건설은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의 소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배 참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교회의 예배였습니다. 예배 참여자들이 서로 기다려 주고, 서로 반기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충고하고, 서로 가르치고, 서로 걱정해 주는 그런 예배를 사도 바울은 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배를 보러 간다”고 말합니다. 예배에 참여하는 자가 있고 그저 보기만 하는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오늘날의 예배는 ‘서로’의 신학을 잃어버렸습니다. 교회의 공동체성이 사라진 것입니다. 공동체성의 상실은 교회됨의 상실입니다.

짐을 서로 지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는 이 말씀은 교회의 공동체성을 잘 드러내는 말씀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짐을 진다는 것은 상대방의 어려움을 헤아려 그것을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누군가 어려움을 당하면 기도해 준다는 말만 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가진 집과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둘 수 있었습니다.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억울한 일이 아니라 기쁘고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 모두 분명하게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인간이 반역하여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창조를 완벽한 것으로 만들어나가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주어진 성령 공동체는 에덴에 주어졌던 공동체보다 더욱 강화되고 폭과 의미가 넓어졌습니다. 에덴의 공동체는 부부 사이의 완전한 결합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제자 공동체는 부부 사이를 넘어, 가정을 넘어 모든 인류가 하나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온 우주의 통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길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재물에 마음이 팔려 정신 못 차리고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가정과 국가, 종교에 매여 있는 사람들은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재창조가 무엇인지, 창조의 완성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며 그분의 뜻대로 당신의 나라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입니다. 그 일에 우리를 불러 주시고 참여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격해야 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은 위대한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에 직접 참여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우리'가 되어 공동체가 되는 일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희생과 헌신과 십자가는 온 인류가 하나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사랑하면서 온전히 하나가 될 때 세상 사람들은 복음의 복음 됨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신 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만나게 하시는 모든 사람들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시간 삶의 모든 정황은 기회이며 사명입니다. 하루하루를 신실하게 살아 주님의 뜻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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